오랜만에 쓴다. 읽기를 일단락 하고 보니 새벽 다섯시가 가까워져 있었고 여느 때처럼 별을 보러 나갔다. 한 손에 빨간 담뱃불을 반짝이는 어떤 아저씨가 하염없이 하늘만 보고 있길래 무슨 일인가, 하여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니 밤하늘에 누가 설탕을 엎은 듯 하얀 알갱이들이 우수수 쏟아져 있었다. 별들이었다. 목성이 가장 밝은 새벽일거라더니 어떤 것인지 목성인지 모르겠고 아니면 목성 탓에 주위의 별들도 덩달아 밝아진 것인지 그저 별빛들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길을 따라 쭉 걸었는데 길이 아니라 별들이 늘어선 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을 피해 최대한 어두운 위치를 찾아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앉아서 하염을 느끼다가, 또 이동해서 다른 어둠 속에서 아연을 보고, 나는 별빛 속에 있었다. 가방을 멘 사람들이 하나, 둘 택시를 잡아 타거나 목적지가 분명한 발걸음을 바삐 옮겼다. 목걸이를 단 동네 강아지가 혼자 새벽 산책을 도도도 나아갔고 나는 트럭의 바퀴소리가 이토록 정답게 들릴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문을 열고 나오기 전에 단편소설 두 개와 비평 네 개를 연달아 읽은 상태였다. 글들이 이토록 마음으로 쉽게 스며든 적이 있던가, 하고 적잖이 놀라며 의아해했는데 밤하늘을 보고 나서는 더 큰 의문과 감탄과 팽창에 그 모든 것이 빛의 입자로 흩어졌다.
사람에게는 어둠이 필요하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만 별빛을 볼 수 있으니까.
차가운 시멘트 담벼락에 청바지를 구겨넣고 앉아 생각했다. 내겐 물리적인 힘이 소진된 것이 아니라 마음의 힘이 닳았던 거구나. 몸을 움직이게 하는 건 의지도, 판단도 아닌 영혼이다. 영혼을 죽게하는 것들이 있다. 그건 단지 어둠이 아니라 어떠한 어둠이고 그 속에서 우리는 그 어떤 빛도 찾지 못한다. 반면 다른 어둠은 오히려 빛을 살린다.
내가 사는 동네는 사람들의 소리로 이루어진 곳이다. 동네 거실 같은 수퍼 앞 마당에는 새벽에 가끔씩 나와 담배를 피는 사람들 위해 주인아저씨가 부러 내놓은 플라스틱 의자들이 가지런하게 정리되어 있고, 동네 할아버지들이 자기 손주가 아닌 아이들의 유모차를 밀어주며 아이고 아이고 하는 곳. 감나무에서 덜 익은 감이 보다 빨리 떨어진 것을 보고 안타까워하며 일면식도 없는 내게 감 이야기를 다짜고짜 건네는 할머니들이 살고, 휴가철이면 차에 캠핑용품을 주렁주렁 단 채로 주차장을 채우는 젊은 부부들이 산다. 오후 세네시면 학교를 파한 남학생들이 체육복을 입은 채로 친구 목에 헤드락을 걸며 장난스레 우정을 과시하며 지나다니는 소란한 길이 되고, 버스 종점에는 출근과 등교, 그리고 동네에 놀러온 바깥 사람들(우리동네는 서울의 유서깊은 힙플레이스 중 하나로도 꽤 유명하다.)이 재잘대는 곳. 아침 시간의 종점은 회사원과 대학생, 근처 소방서의 대원들이 아침 커피를 사기 위해 줄을 선 모습과, 하루의 시작을 동네 마당에 앉아 지난 밤은 어떠했는지를 전국 각지의 사투리로 안부 묻는 노인들로 북적인다.
그리고 대충 슬리퍼를 신고 안 감은 머리로 반바지에 후드점퍼를 껴입은 부은 눈의 내가 지나간다.
비평을 쓰면서 나는 끝없이 이 풍경들 속에서 움직이는 '나'에 대해 물을 수밖에 없다. 조용한 한 사람의 관찰자로서 나는 이곳에서 행복하다.
관찰자의 시선이 가닿는 세상의 장면들이 관찰자의 사물로서 전락하지 않으려면 그 역시도 풍경의 일부로서 감응해야 한다. 그렇지 않거나 못하는 시선은 그저 대상을 포획하여 자기동일성의 어둠 속으로 그것들을 탈취하는 포식자에 지나지 않는다. 감응을 위해서 '나'는 산발적으로 사라진다.
산발적으로 사라졌다가, 나타나기란 곧 움직이는 것을 뜻한다.
그렇게 우리는 살아있다.
비평은 살아있음의 반증이다. 세계를 나의 해석이라는 발 아래에 두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안으로 들어가서 일부가 되고, 다각도에서 바라보고 그 입체감을 몸으로 살아내는 일. 그저 텍스트를 자르고 붙이고 기워넣는다면 그것은 애호가의 스크랩북에 지나지 않을 테다. 박물관을 만드는 일에 일조할 뿐이다. 비평가는 수집가가 아니다. 오히려 수집된 것들을 허물고 살려내는 일, 숨을 불어넣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세상의 숨을 불어넣는 것은 자족적인 차원에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타인들에게 돌려보내는 일이다. 비평은 발신을 의무로 하는 수신이다. 아름다운 수사는 비평의 손톱쯤 되는 것이다. 꾸미기 나름이고 언뜻 내보일 순 있지만 손톱으로 무언가를 잡을 순 없다.
아주 간혹 찾아오는 평형의 상태 속에 있다. 시간이 정지한 듯 하면서도 고요하게 알맞은 속도로 흐른다. 의지와 욕망과 판단을 막아서는 것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다. 경계 안과 밖의 농도가 동일하다. 기공이 활짝 열려 있으나 삼투는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흐르고 있다.
목성이 준 새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