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비가 많이 편안해진 것은 분명 사실이지만 아직 썩 즐겁지는 않다. 초등학교 때부터 친했던 친구를 잃은 날이 항상, 떠오르기 때문이다. 아, 그 친구가 유명을 달리했다는 말이 아니다. 그녀는 전문직 연하남과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아마 본인의 직업에서도 꾸준히 성과를 내어 승진하고 있을 것이다. 사정은 이렇다. 이십대 중반 대학교 복학하기 전, 그때 내 몸은 지금보다 말도 안 되게 약했는데 그래서 비 오는 날에는 모든 약속이 자동으로 취소, 밖에 나갈 생각은 절대적으로 포기해야만 했다. 그날이 딱 그랬다. 그 친구와 만나기로 했던 그날은 원래 비 예보가 없었는데 갑자기 굵은 비가 무섭게 내렸다. 오후 약속시간 이전에 나는 동네 카페에서 책을 읽고 있었고, 친구 근무가 끝나는 시간에 맞추어서 다른 동네에서 보기로 했었다. 그런데 빗줄기는 점점 더 거세어지고 도무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무서웠다. 앞이 캄캄했다. 사실, 이 직전의 약속도 비 때문에 취소되었던 것이라 친구에게 ‘비’라는 말을 다시 꺼내기도 쉽지 않았다. 많은 고민 끝에, 그래도 빗길에 넘어져서 응급실에 가느니 친구에게 양해를 구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조심스럽게 연락을 했다. 친구 역시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난감하다고 했다. 외근을 나와 있는데 비가 갑자기 너무 많이 와서 아이들(친구는 학교에서 담임을 맡고 있었다)을 데리고 이동하는 게 쉽지 않다고 전해왔다. 약속을 다른 날로 미루어야 할 것 같다고 조심스레 말하자 그녀는 웃는 이모티콘을 보내왔고, 그 날은 그렇게 지나갔다. 비는 밤까지 내내 내렸다.
다음 날, 다시 약속을 잡으려고 연락을 했다. 어제의 일에 대해 다시 양해를 구하며 조심히 들어갔냐고 나름대로 다정함을 모아 카톡을 보냈지만, 그 톡은 1이 사라진 채로 그 어떤 답장도 받지 못했다. 하루가, 이틀이, 일주일이 지나도 그에게서 다른 연락은 없었다. 몇 년 쯤 뒤에야 다시 내가 잘 지내냐며, 너무 오랜만인데 생각나서 연락한다고 톡을 다시 했을 때, 그녀 역시 (아마도 예의상의) 반가운 이모티콘과 함께 답장을 했지만 그 대화 역시도, 그녀 쪽에서 다시 일방적으로 답하지 않는 방식으로 끊기고 말았다. 그 친구와는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친구였고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모두 다른 곳으로 갔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메일과 전화로 분기마다 서로에게 일어난 삶의 변화들을 공유하며, 그리고 힘든 일들을 넘어갈 때마다 도닥여주곤 했다. 둘 다 서울로 대학을 와서 서울에서는 직접 자주 볼 일이 더 많기도 했고 말이다. 그 갑작스럽게 비가 많이 오던 날, 그 전날까지도 친구는 예비 시어머니가 자신에게 너무나 많은 것들을 요구하고, 마치 이미 며느리인 것처럼 일을 시킨다고 토로해왔었다. 들려준 여러 일화들을 바탕으로 생각해보면 친구인 내 입장에서는 그 결혼은 정말 도시락 싸다니며 말려야 했을 결혼이었지만, 그저 들어줄 밖에. 일 년쯤 뒤의 어느 날 웨딩 사진으로 바뀐 카톡 프로필 사진을 보고 마음속으로 진심어린 축하를 보냈다.
아마 비 오는 날의 약속 취소 그 하나의 이유만으로 내가 그녀를 잃은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적어도 그녀만큼은, 내가 병원을 어떻게 다니고 진료 받는지를 매우 잘 알고 있던 그녀만큼은 이해해주지 않을까 하는 내 생각이, 틀렸을 뿐인 것이다. 타인이 지닌 이해의 폭은 우리는 함부로 가늠할 수도, 요청할 수도 없다. 지금 다시 그 비 오던 날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나는 친구에게 미안하다고, 다른 날에 보아야 할 것 같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테다. 씁쓸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벌써 육 년도 훨씬 더 된 일이지만 여름의 비 오는 날마다 나는 그 친구가 생각난다. 남편이랑 잘 지내고 있는지, 시어머니랑은 그렇게 힘들지는 않은지, 보수적인 교원 사회와 학부모들에게서 듣던 여성혐오적인 말들과 견디기 어려워하던 가시 돋힌 말들은 조금 더 수월하게 대응하게 되었는지, 여전히 달달한 커피를 좋아하는지, 궁금하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는 채로 사과할 기회조차 없이 그녀는 내게서 사라졌지만 그 친구가, 그게 그녀를 위해 내린 최선의 선택인 것이기에 존중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미안한 마음이, 부끄럽고 민망한 마음이 굴뚝같이 들어도 그 날의 내가 약속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아무리 가깝고 많은 것들을 이해하며 살아온 관계에서도 실망과 서운함을 금할 수 없는 날은 반드시 찾아온다.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이해하려는 태도는 삶에서 매우 중요하지만,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지 않으려는 자세도 꼭 필요하다. 소극적인 방어가 아니라 그게 타인과 나 모두를 위하는 최선의 존중일 때가 있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 없음을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은 최후의 선택지다. 그 친구도 그 친구만의 최선을 우리 관계에서 다해주었을 것이다. 나 역시도, 관계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나의 최선을 모두 상대방에게 주었으므로 후회 없이, 그의 선택을 수긍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아, 그래서 삼십대의 비 오는 여름이 더는 두렵지 않아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리는 비를 어떻게 할 수는 없으니까. 다만 그 바뀐 세계, 갱신된 기후 속에서 내가 감각할 수 있는 것들을 향해 눈을 맞추는 것이다. 물론 바탕에 깔린 잔잔한 우울은 어쩔 수 없다. 그건 여름의 습기와 함께 몸으로 안고 가는 것이니. 비가 그치고 나면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상쾌함 속에서 세상이 마치 태초의 순간처럼 반짝거린다는 것도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길에서라도 그 친구를 어쩌다 마주치게 된다면 나는 주저 없이 달려가서 반갑게 잘 지냈냐고, 건강하냐고 물을 거라는 것도 안다. 그 날 약속을 못 지켜서 정말로 미안하다고, 하지만 나는 이제 많이 건강해져서 맑은 날이면 너보다도 아주아주 오래 걸을 수도 있다고, 네 생각을 문득문득 했었다고 전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