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을 좋아한다고 말할 때 나의 경우 그것은 눈살을 찌푸려야만 하는 밝은 햇빛 때문이다. 혹은 귀청을 찢는듯한 매미들의 가열찬 울음소리, 플라타너스의 굵은 이파리들이 반질반질 윤을 뽐내며 바스락대는 소리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늘’은 그렇게 많이 생각해본 적 없다. 그토록 햇빛이 강렬하다면 꼭 그만큼 큰 그늘을 만들 텐데도 말이다. 오히려 내게 그늘이라는 말은 햇빛이나 여름이 아니라 사람을 떠올리게 한다. 사람의 그늘 말이다.
물론, 누군가의 그늘 아래에서 쉬다, 와 같은 말도 있겠지만 누군가를 향해 드리우는 그런 넓은 품의 그늘 말고, 내가 떠올리는 것은, 사람이 한 그루의 나무라면 응당 갖게 되는 그런 그늘이다. 앞에서는 좀체 보기 힘들고 슬몃 발견하게 된다 하더라도 그 길이와 폭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그런 어둠 말이다. 아직 이 년이 채 안 되는 지난 시간을 잠시 돌아보면 그 시간들은 내 그늘이 자라는 시간들이었나, 싶다. 그림자에 대한 이 알 듯 말 듯한 모호한 비유는 아마 읽는 이에 따라 저마다 다른 구체적인 경험으로 환기될 것이다. 예상치 않게 훌쩍 자라버린 이 그림자를 보면서 그간의 시간이 태양에 가까워지던 때였던가 하고 생각해본다. 태어나서 처음 보고 듣고 겪는 것들 사이를 정신없이 쏘다니며 궁금해하고, 묻고, 겁 없이 사랑하고 그게 아무리 어렵고 힘들고 이상한 것이었어도 내가 사랑하니까, 내 사랑이니까 괜찮다고 읊조리던 날들. 방파제처럼 날마다 나를 가로막는 무엇들에 넘어지고 다쳐도 드문드문 만나는 꽃과 나비와 나무들을 그저 좋아하며 마음에 담던 날들. 우리가 걷는 여정의 어떤 길목에서는 잠깐 그럴 수 있다. 그렇게 험난한 시절도 있고 그 길이 끝나면 다른 안온한 길이 펼쳐진다. 그런데 내내 자갈이 구르는 가시밭길이라면 그건 맞는 길일까, 마냥 다치면서도 앞으로 가야하는 것일까. 그때는 지도를 다시 펼쳐들 필요도 있다. 더구나 그 험난한 길이 난데없이 나타난 예상치 못한 것이라면 더더욱. 더더욱.
누군들 부러 아픔을 자처하고 싶을까마는,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면 그 아픔이 유의미하길 모두 간절히 바랄 테다. 그래야 견디는 힘이 생길 테니까. 이십대 초반의 어느 여름에 정말로 많이 들었던 곡이 있다. <아픈 만큼 자라요> - 스윗소로우 (인호진 Solo) 멜로디나 가사가 특출난 곡은 결코 아니지만 그냥 그 곡의 제목 때문에 하염없이 들었던 것 같다. (부러 찾아 들으시라고는 못하겠습니다만, 그래도 궁금하실까봐…… ) 지금 이 시절의 힘듦은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다만 그건 지금 알 수 없고 시간이 지나야 완성되는 어떤 의미일 것이라고, 그러니 아플 수밖에 없다고. 물론, 자라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아플 필요는 없지만 아픔을 겪으며 자란 사람만이 볼 수 있는 풍경이 분명 있고 (그리고 그것들은 대개 놀랍게 아름다운 것들을 선사할 때가 많다), 역으로, 조금 잔인한 말일 수도 있지만 아프다고 해서 마냥 이전보다 더 나은 상태가 되는 것은 또 아니기도 하다. 같은 맥락에서, 마치 종교적인 겸허함에서 나오는 태도처럼, 부러 고행을 자처하는 자세가 인격적 성숙을 담보하는 것도 아니다. 누군가의 그늘은 자라지 못하고 (태양에 가까이 가지 못하고) 그저 아래로, 아래로 깊어져서 자기 안의 수렁에 갇히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가 그림자를 가져야만 한다면 그것의 키를 키우는 게 좋다고 나는 생각한다.
결국, 만약 당신이 지금 어떤 고통을 겪고 있다면 거기서 빠져나오는 방법 자체가 중요하기도 하겠지만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그 아픔을 겪어내는 동안 그것이 자기 연민으로 귀결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참 어렵다.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대 하등 좋을 일이 없다. 자기 연민은 그 안에서 괴로워하는 것이 최선의 행복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나 유효하다. 그러나 그 안에서 보는 세상이 얼마나 다채롭고 아름다울지는 잘 모르겠다. 고통과 ‘나’뿐인 세계가 뭐 그리 대단하겠는가.
온갖 난리법석으로 내 몸과 세상과 고투하던 이십대를 지나서 지금 알게 된 것은 세상이 주는 아픔은 참 여러 가지가 있다는 거다. 어릴 땐 아픈 상태가 삶의 일시적-비정상적 상태인 줄로만 알고 그것을 없애는 방법, 아프지 않을 수 있는 삶의 사회경제적 조건을 획득할 방법에 골몰했었다. 지금은 안다. 아픔이 없는 길은 결코 없으며, 문제는 그 아픔의 서로 다른 얼굴들을 이제는 알아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기꺼이 감내해야 할 고통이 있고, 피할 수 있다면 피하는 게 좋은 아픔이 있고,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내게 투사하는 아픔이 있고, 혹은 내가 누군가를 상처내는 아픔들이 있다. (이보다 훨씬 많은 종류가 있다.) 의미 없는 아픔들도 많다. 실제로 세상엔 전혀 개연적이지 않고 심지어 부당하다고 느껴질 법한 아픔들이 훨씬 더 많다. 이것들 사이를 헤치고 나가는 것이 이 삶이란 것을 살아나가는 일의 구체적인 모양새이기도 하다.
그늘을 기른다는 말, 그것의 키를 키운다는 말은 살면서 닥치는 아픔들을 외면하지 않고 잘 직면해서 ‘나’라는 사람의 그늘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다. 나의 두 손, 두 발을 옥죄는 자기 연민의 수렁이 아니라 더 큰 빛을 만났을 때 생겨나는 생의 이면으로, ‘나’의 일부로 수치나 혐오로 숨기고 싶은 오점이 아니라 빛과 그림자처럼 자연스러운 삶의 지문(fingerprints)으로 생동하게 둘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아픔은 감정이면서 사건이지만 동시에 기억이기도 해서 그것들도 내가 살아가는 일에 따라 모습을 바뀐다. ‘아픔’도 함께 이 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나와 더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