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에만나요 (최리외 X 전승민) | 2023. 12. 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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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tter#19 '나'로부터의 탈출─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1982)
전승민
안녕하세요, 전승민입니다. 이번 레터는 금요일이 아닌 월요일에 발송하게 되었습니다. 기다려주신 구독자님들께 감사하고 죄송하다는 말씀 전해올립니다. 글을 쓰다보니 저에게 중요한 주제로 확장되었고 작성을 완료하는 데에 예상보다 많은 시간이 들었습니다. 오늘 발행하는 글은 일상의 이야기라기 보다 평소 제가 품어온 저의 내밀한 생각의 일부를 공유하는 글입니다. 늘 읽어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리며, 구독자님의 생각과 저의 생각이 어떻게 다르고 또 같은지 가늠하는 즐거움을 만끽하셨으면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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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가끔 스스로를 부러 어둠 속으로 내몬다. 내몬다는 말이 지나치게 피학적인 표현처럼 들린다면 이렇게 말해보자. 때로 우리는 제 발로 빛이 없는 곳을 찾아 나선다. 이것은 방어나 회피 등의 이름으로 명명될 징후적 현상이라기보다 (물론 두 눈을 감는다고 해서 빛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욕망의 적극적인 추구에 가깝다. 그 누구의 시선도 ‘나’의 존재를 발견하지 못하도록 숨기고픈 욕망 말이다. 물론 존재를 완전히 감추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단지 일시적인 숨김 효과에 불과하다. 인간은 가끔 세상 모든 살아있는 것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을 때가 있다. 도망치고자 하는 대상에는 ‘나’ 또한 포함이다. 인간의 내부에는 각자가 지닌 빛이 있어서 완전한 어둠으로 숨어들기 위해서는 자신 안의 불빛까지도 꺼야한다. 그러므로 도주가 이끄는 최후 단계는 ‘나’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가령, 페소아의 다음 문장은 그러한 욕망을 아주 정직하게 서술한다.
나는 달아나고 싶다. 내가 아는 것으로부터, 내 것으로부터, 내가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달아나고 싶다. 나는 홀연히 떠나고 싶다. 불가능한 인도나 모든 것이 기다리는 남쪽의 섬나라가 아니라, 어딘가 알려지지 않은 곳, 작은 마을이나 외딴 장소, 지금 여기와는 아주 다른 곳으로. 나는 이곳의 얼굴들을, 이곳의 일상과 나날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나는 낯선 이방인이 되어 내 피와 살 속에 뒤섞인 위선에서 벗어나 쉬고 싶다. 휴식이 아니라 생명으로서 잠이 나에게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싶다.
―페르난두 페소아, 「167」, 『불안의 서』 (배수아 옮김, 봄날의책, 2014)
자아로부터 달아나는 행위는 혼자가 되는 행위, 고립과 다르다. 고립은 오히려 자아를 주체의 몸 쪽으로 더욱 끌어당긴다. ‘나’로부터 달아나기 위해서는 세계의 한 가운데로 나가야 한다. 가령, 우리는 유행하는 시가지의 북적이는 인파 속에서 익명의 한 사람으로 걸어 다니며 사람들을 관찰할 때, 다시 말해 ‘나’가 ‘나’에 대한 자의식을 발동하는 일을 잠시나마 멈출 수 있을 때 우리는 내가 ‘나’와 긴밀히 연루된 상태로부터 일시적으로나마 놓여난다.
극장은 탈출에 대한 이러한 욕망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다. 지금은 거의 가지 않지만 한때 혼자 영화관을 줄기차게 방문했던 이유는 그래서였다. 내게 있어 ‘영화를 보기 위해서’라는 말은 ‘나’에 대한 판단과 고민과 생각, 공상을 멈추기 위해서, 라는 말과 동일하다. 서사를 다루는 콘텐츠가 우리에게 주는 이로움 중 하나는 ‘나’가 발생시키는 자극을 차단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리모콘을 손에 쥐고 VOD의 재생 버튼을 누르는 거실 소파는 그래서 ‘극장’이 되지 못한다. 집이야 말로 무수한 ‘나’들로 빽빽이 들어찬 장소이기 때문이다. 소파에서 보는 영화는 주체를 자아로부터 해방시키지 못한다. 오히려 영화를 자아 속으로 편입시킨다. 책은 어떨까? 그것을 읽는 장소의 변화에 따라 같은 책도 ‘나’에게 다른 힘을 발휘한다. 이불 안에서 읽는 책보다는 자주 찾지 않던 공원 벤치에서 바람을 쐬며 읽는 책이 ‘나’를 전에 없던 세계로 데려갈 테다. 읽는 행위, 다시 말해 보는 행위는 세계를 구성하는 구체적인 물질성과 주체의 몸 사이에서 일어나는 화학적 상호작용이다. 그것은 내용과 의미, 그리고 새로운 시공간을 창발한다. 낯선 공간 속에서 이미 알던 대상들은 낯빛을 바꾸어 처음 조우하는 사물들이 된다.
그렇다면 극장에 설치된 스크린, 낯선 장소에서 우리가 펼쳐드는 책의 페이지 한 장, 한 장은 원초적 무형의 세계다. 이처럼 타자와의 접속은 아이러니하게도 백지(tabula rasa)로부터 시작한다. 관계는 ‘나’가 소거되어 있는 완벽한 무의 세계에서 태어난다. 한데, 우리는 저마다의 실존을 갖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저마다 세계를 지각하는 고유한 스키마를 보유하고 있다는 말인데, 이러한 지각 방식을 텍스트에 기워 넣으며 저마다의 독해를 해나가지만 그것의 결과로 우리가 받아드는 것은 해석의 완성이 아니라 또 다른 출발점, 새로운 한 페이지의 백지일 따름이다. ‘내’가 그간 알던 세계는 텍스트를 읽기 시작함과 동시에 단번에 무너져버린다. 단 하나의 장면, 단 한 단락의 텍스트가 우리의 실존을 비가역적으로 변형한다. 독자와 작가가 저마다 지향하는 문학론은 다르겠으나 내가 지향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나’를 앞세우지 않는 문학, 고체처럼 단단한 ‘나’의 분자들을 흩뜨려 액체와 기체의 상태로 유동하게 하는 힘으로서의 문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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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부터 멀어지고자 하는 욕망은 글쓰기가 자연 발생시키는 나르시시즘으로부터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고자 하는 노력으로 확장된다. 조지 오웰은 1946년에 발표한 그의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Why I Write?)”에서, 글을 쓰기 전의 작가는 그가 결코 벗어날 수 없는 무수히 많은 자기 인식을 갖게 되며 그러한 것들에게 구속된 미성숙한 상태에서 벗어나야만 하고, 그러한 탈출은 의심할 여지없이 작가의 임무라고 말한다. 그는 글의 말미에서 작가의 자아가 가진 나르시시즘─자신의 경험과 삶의 반영을 종이에 고집스럽게 기입하려는 욕심을 버릴 때, 겨우 읽을 만한 글을 쓰게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다양한 정체성과 당사자성을 기반으로 쓰인 수많은 에세이들이 범람하는 ‘자기-서사’의 시대에 오웰의 명제는 시대착오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지금 이 시대에야 말로 오웰의 저 말이, 나르시시즘으로부터의 탈출이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왜’ 읽고 쓰기를 원하는지를 다시금 생각해본다면 더더욱 그렇다. 우리는 ‘나’로부터 벗어나고자 쓴다. ‘내’ 안에서 ‘나’를 억누르는 꽉 찬 것들을 활자로 배출하고 버린다. 또는 ‘나’를 구성하고 있는 비가시적인 물질들을 문자로 시각화하여 타자화한 뒤 거리감을 부여하는 방식을 통해 자아로부터 멀리 떨어뜨린다. 그래야 ‘나’ 또한 하나의 ‘너’나 ‘그/녀’인 타자가 되어 ‘나’를 비껴날 수 있다. ‘나’의 시선으로 확보한 ‘나’의 모습을 강화하는 것은 문학적인 쓰기가 아니다. 이쯤에서 많은 이들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떠올릴 오토 픽션에 대해 잠깐 말해보자면 (조만간 발표될 다른 글에서 이를 다룰 테지만) 가령, 1인칭 시점을 채택한 오토 픽션은 주체로서의 ‘나’가 대상으로서의 ‘나’를 자임하며 입체적인 거리를 부여하는 서술이다. 오토 픽션의 주체가 자아와 형성하는 거리는 이차원의 평면이 아니라 삼차원의 입체 공간이다.
앞서 언급한 페소아의 책 『불안의 서』(1982년 출간)는 언뜻 보기에 정말로 ‘불안’(anxiety)으로 점철된 것 같지만 실은 불안이 아니라 자유의 극한 속에서 활보하는 ‘나’의 말들로 채워져 있다. 영어 제목 The Book of Disquiet 은 말 그대로 ‘침묵하지 않는’(disquiet), 계속해서 쏟아져 나오는 말들로 인해 흔들리고 유동하는 상태를 말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불안’은 그러한 의미의 세목들을 종합한 최종적인 의역의 결과이고, 그러므로 나는 페소아의 말들을 불안이 아니라 차라리 ‘불안정’이라고 번역하고 싶다. 오웰의 말에 따르면 페소아가 쏟아내는 끊이지 않는 말의 기록은 작가가 ‘나’로 인해 질식하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도모하는 탈출의 행위, 자유의 극한에 도달하기 위한 발화다. 세계가 주체에게 마구 내던지는 자극의 다발들을 몸으로 곧장 흡수하고 체화하는 것이 아니라, 요컨대 감각을 감각이 아닌 감각의 인지 상태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나’는 그때 ‘나’로부터 한 걸음 물러서게 된다.
정말 오랫동안 나는 존재하지 않는 상태였다. 내 마음은 지극히 고요하다. 아무도 나의 진정한 모습과 다른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방금 무엇인가 아주 새로운 일을 했거나 뒤늦게 한 것처럼 숨을 쉬는 나를 느꼈다. 의식을 갖고 있음을 의식하기 시작한다. (……) 길을 걷다 고개를 들고 성벽이 세워진 언덕 위로 차가운 불덩이로 만든 반사경 같은 노을이 십여 개의 창문을 불태우는 모습을 본다. 그 단단한 불의 눈 주위로, 언덕 위에는 하루가 저물 무렵의 포근함이 가득하다. 적어도 지금 나는 슬픔을 느낄 수 있다. 지금 막 나의 슬픔이, 저 지나가는 전차의 갑작스러운 소음과 젊은이들이 대화하는 소리와 살아 있는 도시의 잊혔던 속삭임과 마주치는 것을─나는 그것을 내 귀로 보았다─의식할 수 있다. 정말 오랫동안 나는 내가 아니었다.
―페르난두 페소아, 「139」, 『불안의 책』 (오진영 옮김, 문학동네,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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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라는 존재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갖 역설로 구성된 입체이므로 그가 지각하는 세계상 또한 역설적인 과정을 통해 만들어 진다. 마치 존재하지 않는 상태로 ‘나’가 있을 수 있을 때 (역설1) ‘나’의 존재하는 슬픔을 느낄 수 있고 (역설2) 도시가 살아서 만들어 내는 복잡한 소리들을 감각하며 (역설3) 나아가, 그 소리들을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볼 수 있게 된다. (역설4) ‘불안’이라고 이름 붙여진 책의 서술자는 자유의 극점을 점유한 채로 사유와 발화를 무한에 가깝게 탕진하고 세계와 ‘나’ 사이의 공간을 활보한다. 이러한 역설들이 성립 가능한 이유 또한 역설의 층위에서만 설명된다. (이토록 복잡한 단순함이라니!) 그러니까 ‘나’가 ‘나’를 폐기하고자 하는 욕망은 문학이라는 행위, 읽고 쓰는 행위를 통해서 실현될 수 있다는 말이다. 주체가 주체를 무너뜨리기 위해 주체의 언어를 기록하여 휘발되는 소리를 문자로 단단히 붙들어 매는 것, 이것이 역설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이런 피로가 몰려오면 삶의 중단 (……) 보다 더 무섭고 심오한 것을 원하게 된다. 즉 처음부터 내가 아예 존재하지 않기를 원하게 되는데,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 그리고 이 증상은 이에 대한 글을 쓰는 일을 통해 치료된다. (……) 문학이 쓸모가 없다지만 적어도 이 경우에는, 비록 소수에게만 해당되기는 해도 분명 소용이 있다.
―페르난두 페소아, 「140」, 위의 책
최근 몇 년 동안 내가 극장에 거의 가지 않게 된 것은 코로나라는 거시적인 맥락도 분명 작용했겠지만, 굳이 극장에 가지 않아도 ‘나’를 낯설게 보게 하는 여러 사건과 시공간들이 생겨나서라고 생각한다. 태어나서 문학과 이토록 가까워본 적이 있었던가. 문학은 나의 모든 것을 낯설게 만들었다. 종종 써오던 일기도, 어릴 때 읽었던 동화책과 소설들, 그리고 나와 관계 맺고 있는 여러 사람들을 다시 보는 시선도 모두 문학에 의해 처음 경험하는 과정 속에서 다시 읽히는 중이다. 삶을 구성하는 것들의 좌표가 흔들리면서 모든 것이 재의미화 되고 재정렬 되고 있다. 페소아의 책을 ‘불안’이라 번역한 역자들의 의중도 이러한 맥락이지 않을까? ‘나’를 자아 속으로 더욱 더 침잠시키는 어둠의 불안이 아니라 삶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 한줌의 햇빛과 흩어지는 노을, 거리의 익숙한 소음마저도 자아가 알고 있던 어제로부터 추방시켜버리는 극한의 자유─‘나’를 자아로부터 해방시키는 요동하는 불안이리라. 내게 『불안의 서』는 그래서 ‘자유의 책’이다. 나는 내가 문학 속에서 흩어지고 모이고, 다시 해체되고 재구성 되는 것을 바라보고 싶다. 물론, 문학은 내 삶은 전에 없이 복잡하고 꼬이게 만들었다. 새로운 고통의 종류를 알려주었고, 단순하던 것들을 어려운 역설 속으로 몰아넣으며 평화롭던 땅을 복잡한 미로로 만들었다. 이러한 위태로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니,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극한의 자유다. 헤맬 수 있는 자유, 오늘과 내일은 어제와 다를 수밖에 없다는 필연적인 변동의 가능성은 나를 숨 쉬게 하는 궁극의 불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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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에 만나요 (최리외 X 전승민) meetusonfriday@gmail.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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