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방적인 고백 (feat. 호두)
안녕하세요, 전승민입니다. 오늘은 여러분들에게 보다 직접적인 서신을 작성하려고 합니다. ‘편지’라는 주제어에 가장 걸맞은 양식은 아무래도 정말로 편지를 쓰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요. 저는 편지 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그래서 이번 회가 더욱 신이 납니다. 비록 답신이 없는 편지라 하더라도 말이지요. 혹, 이 편지에 관해 어떤 답장을 쓰고 싶으시다면 저의 메일주소 (nrz5haeyo@naver.com) 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또 모르지요. 어떤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될지 말입니다.
시월의 마지막을 지나보내고, 본격 십일월입니다. 한 해가 두 달밖에 남지 않았음을 비로소 실감합니다. 여러분은 언제 일 년을 돌아보시나요? 대개는 연말연시에 지난해를 돌아보지만, 저는 주로 가을의 한가운데가 오면 일 년을 돌아봅니다. 지난겨울부터 올해 초의 겨울, 봄, 그리고 여름과 초가을까지가 저의 연말정산 대상이지요. 막상 십이월이 닥치면 봄에 있던 일들은 마치 지난해의 일처럼 까마득해집니다. 그래서 연말에는 한 해를 곱씹어 보기보다 떠나보내는 시간을 갖고, 다가올 새해에 실현해 볼 것들을 탐욕스럽게 욕망하곤 합니다. 한 해의 끝자락이 이미 저에겐 시작인 셈이지요.
지난 계절들을 자주 곱씹는 가을에는 유독, 편지를 쓰고 싶은 충동도 자주 느낍니다. 누군가들이 많이 보고 싶어지고, 바쁨을 핑계로 봄과 여름동안 억눌러온 마음을 슬슬 풀어보려는 것이지요. 누군가가 보고 싶어질 때 그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지는 것은, 그와 함께 했던 시간을 종이 위로 되새기는 과정에서 그 시간을 잠깐이나마 다시 살아볼 수 있기 때문인 것 같아요. 핸드폰 갤러리를 뒤적이거나 이미 써둔 일기장을 펼쳐보는 것도 한 방법이겠지만, 그래도 편지를 쓰는 것이 더 제격입니다. 그와 내가 이미 겪었던 시간을 아직 오지 않은 시간 속에 기입할 때 추억은 더욱 현재형으로 살아나니까요. 말하자면 우리는 편지를 쓰는 와중에 우리가 지나 보낸 시간을 낯선 깊이로 들여다보게 되고, 그러한 내 이야기의 수신인인 ‘너’와 함께 ‘나’의 시간은 객관화 되거나…… 혹은 더욱 심층적인 상호주관 속에서 특별한 의미를 재발견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고 싶은 이에게 쓰는 편지는 내 삶을 돌아보는 아주 좋은 글쓰기가 되기도 하지요.
물론, 삶을 돌아보려는 목적으로 편지를 쓰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겁니다. 하지만 편지를 쓰다보면 반드시 뒤를 돌아보게 된다는 말이지요. 더구나 거기에 적힌 과거는 내가 알지 못하는 ‘너’의 시간을 통해서 전과 다른 의미를 획득하게 됩니다. 언제나 그래요. 예외란 없습니다. 우리가 주고받는 편지가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사소한 내용으로 채워진다 하더라도 늘 특별해지는 이유는 바로 그래서지요. 과거의 사실 뿐만 아니라 글쓴이의 시선과 감정, 마음이 활자에 스며들어 편지를 살아있는 물질로 만듭니다. 거절이나 실망, 슬픔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담긴 것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지요. 거기에 적힌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모두 소중하고 애틋해지는데, 그런 이상한 경험을 몇 번이고 할 때마다 저는, 극구 나의 것이 아니라고 부인하고 싶어지는 복잡하고 뒤엉킨 어떤 어둠들마저도 결국엔 중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이르고 맙니다. 비록 그것이 마지막 마침표를 쓰고 나면 곧장 휘발되기 시작한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이번 편지에서 저는 저의 최근을 돌아보는 사적인 이야기를 들려드리려고 합니다. 편지의 특징 중 하나는 (안타깝게도) 이것이 꽤나 일방적인 대화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저는 일방적으로 듣는 것에서 많은 즐거움을 찾는 인간이기 때문에, 여러분께도 이렇게 요청합니다. 생각보다 우리는 타인의 이야기에 길게 집중하는 시간이 적지요. 게다가 우리는 얼마나 즉각적인 반응을 요하는 시대에 살고 있나요. 편지가 주는 아날로그적인 기쁨은 라디오나 텔레비전 등이 일방향적으로 송출하는 컨텐츠를 ‘바라보는’ 것과 비슷하다고도 생각해요. 조금은 느린 답신과 반응(시청자 의견이나 라디오 코너의 사연 등)이 필연적으로 품게 되는 시간의 부피가 두 대화자 사이의 거리를 애틋하게 만들어주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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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을까요. 8월 정도면 적당할 것 같습니다. 일기를 펼쳐보지 않고도 기억만으로 더듬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시점인 것 같아요. 그때 저는 기획위원으로 일하고 있던 모 출판사로부터 일방적인 해촉 통보를 받고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습니다. 사측은 명시적인 이유를 알려주지 않았고, 사유를 고지해달라는 저의 요청도 막무가내로 회피하고 있었거든요. 회사뿐만 아니라 중간에 함께 얽힌 이들과의 소통에도 문제가 있어서 더욱 어려움을 겪고 있었지요. 그들은 청탁을 통해 원고를 발표할 수밖에 없는 저의 입지를 무기처럼 들고 있었어요. 하……. 어쨌든, 그런데 그런 와중에 우연히 개 한 마리와 같이 살게 됐습니다. 인스타그램을 보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호두라는 이름의 시바견이에요. 어린 시절을 시골 외갓집에서 진돗개와 함께 보냈던 터라 언젠가는 꼭 개와 다시 사는 삶을 꾸리고 싶었거든요. 유기견 입양 신청을 몇 번 했었는데 운이 좋게 이번에 기회가 왔던 거지요.
여러분, 저는 정말이지 반려동물과 함께하는 삶을 꼭 누려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일상을 완전히 다른 각도로 보게 됩니다. 여태까지 제가 알고 있던 진실들은 반쪽자리였음을 서서히 그러나 빠르게 깨달아가고 있어요. 예를 들면, 저는 서로 다른 존재가 나누는 소통에 언어가 차지하는 비율이 어쩌면 절반이 안 될지도 모르겠다는 확신이 들어요. 시바견은 기질적으로 예민하고 엄살이 심해서 양치나 발톱을 깎이는 일이 정말로 고역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견주들은 그 두 가지를 꼭 해내야만 하지요. 개의 건강을 위해서요. 얼마 전에 발톱을 깎이느라 호두를 안아들고 (넥카라를 씌우고) 발톱을 깎는데 발버둥을 하도 치는 바람에 난리도 아니었어요. 어찌저찌 오른쪽 발톱 다섯 개를 깎이는 데 성공했지만 문제는 그때부터였어요. 저한테 단단히 삐지고 화가 났는지 평소랑 다르게 가까이 오지도 않고, 오려다가도 멈춰서 고개를 홱 돌리고 있지 뭡니까. 이름을 불러도 무반응이고요. 간식을 줘도 그때뿐……. (간사한 녀석!) 태도는 똑같았죠. 다음 날 저녁까지도 녀석은 내내 삐져있었기 때문에 저도 외출하면서 마음이 착잡했습니다. 속상했고요. 억울하기도 했고요. 다 저 좋으라고 하는 것이거늘……. 그러다 일 때문에 집을 평소보다 좀 오래 비웠고, 꼬리를 한여름 선풍기 날개처럼 팽팽 돌리면서 밤중에 귀가한 저를 환대해주는 걸 보자마자 서운한 마음은 녹아버리고 말았죠. 다행이었지만, 다음에 또 발톱을 어떻게 깎여야 하나 고민이 아주 심각합니다.
호두는 유기견이었고 피부 아래에 내장된 동물등록칩에 이전 주인의 정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인이 구청의 연락을 의도적으로 계속 거부하는 바람에 보호소에서 계속 지내고 있었어요. 아마도 오랫동안 방임하다가 개가 ‘귀여운’ 강아지 시절을 지나자 버린 것 같았어요. 온갖 종류의 장난감으로 놀아주려고 해도 노는 방법을 전혀 모르는 눈치라 난감했지요. (개는 강아지 때 노는 법을 익히지 않으면 평생 모른다고 해요. 이건 개나 사람이나 똑같은 것 같습니다. 역시 사람은 젊어서 놀아야…!) 간식을 심어둔 노즈워크용 봉지를 코가 떨어져 나갈 것처럼 열렬히 탐색하거나 주말에 남산 공원에 가서 힘차게 뒷발차기를 하고 뛰어다니는 게 호두의 놀이입니다. 모래나 잔디밭도 아주 좋아해요. 가끔 더 신이 나면 바닥에 쌓아둔 책들을 코나 발로 젠가 게임하듯 슬슬 밀면서 놀기도 합니다. 제가 가장 아끼는 담요를 마치 사나운 맹수처럼 한껏 물고 늘어지기도 하고요. (호두는 대부분의 치아가 절반쯤 부러져서 맹수가 되려는 꿈을 완벽히 이루지는 못할 것 같지만요…….)
만약에 호두가 사람이었다면, 저는 그에게 “너는 뭘 좋아해?”라고 물었을 테고 호두는 자기가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들을 말해줬겠죠. 저는 그것들을 마련해줬을 테고요. 하지만 호두는 인간의 언어를 구사하지 않기 때문에 무엇을 싫어하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제가 이해하는 데에는 그보다 비교도 안 되게 많은 시간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것이야 말로 우리가 나눈 대화가 아니었나 해요. (물론 호두가 좀 더 답답해 했겠지만요.) 이런 저런 선택지들을 하나씩 실험해 보면서 서로의 취향과 기호를 알아가는 일, 집안에서 어느 자리를 좋아하고 산책할 때 어떤 길을 좋아하는지 서서히 알게 되고, 호두의 눈이 세모가 되면 졸린데도 자기 싫어하는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되고, 제가 책상 앞에 앉아서 자리를 5분 이상 떠나지 않을 때는 저만의 시간을 보내는 때라는 것을 호두가 알게 되는 일, 아침에 해가 떠도 침대에서 꿈쩍하지 않으면 침대보를 물고 늘어지고 뛰어다니면서 저를 깨워야 한다는 걸 알게 되는 일……. 만약에 이 모든 것을 인간의 말로 주고받았다면, 우리는 그 밖의 다른 사소하고 작은 서로의 습성들에 대해 알 수 있었을지 과연 의문입니다.
개와 함께 사는 일상은 나날이 삶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일깨워줍니다. 호두와 함께 살게 되지 않았더라면 저는 죽기 전까지 몰랐을 경이로운 빛들을 알지요. 시바견들은 가끔 바닥에 머리를 비비면서 가르릉 거릴 때가 있는데 저는 처음에 그것이 짜증이나 화가 났다는 표현인 줄로만 알았어요. 유튜브나 인스타그램에서 찾아보시면 알겠지만, 표정이 그리 상냥하진 않거든요. (송곳니도 썩 잘 보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건 기분이 좋거나 장난을 치고 싶을 때 하는 행동이라더군요. 인간의 기준으로 동물을 이해하려고 하면 완전히 어긋나 버릴 때가 많다는 것도 온몸으로 경험하는 중입니다. 사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도 그래야만 하는데 말이지요. 같은 언어로 소통한다 할지라도 사실 그 언어의 외피 아래에는 각자가 주관적으로 담지하는 고유한 내용이 있잖아요. 나에게는 퉁명스러운 말일지라도 상대방에게는 관심과 호의가 가득 담긴 말이 가능한 것처럼요. 그 맥락과 뉘앙스를 깊이 이해하는 것이 진실한 대화에 한 걸음 다가가는 것일 텐데, 저는 호두와 살면서 매일 그런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개에 관한 이야기는 이쯤으로 해둘까요. (이미 꽤 많은 분량을 써버렸지만요.) 기회가 된다면 저는 반려견과 함께 하는 문학과 삶에 대해 더 많은 글을 써보고 싶습니다. 그것은 제가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신비롭게 알아갈 놀라운 경이이기 때문이지요. 이것은 개와 인간의 소통이지만 동시에 인간이 인간과 소통할 때 반드시 지향해야 할 어떤 이상적인 대화법을 알아가는 일이기도 합니다. 가령, 저와 호두가 2개월이 조금 넘는 시간동안 이렇게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둘 다 서로를 믿었기 때문이에요. 호두 입장에서는, 어느 날 제가 갑자기 낯선 곳으로 그를 데려왔고 뜬금없이 밥을 주고 재우는데 그래도 순순히 따라라주었고, 저는 호두가 방어적인 태도를 누그러뜨리고 서서히 자기표현을 할 수 있도록 기다렸고요. 말없는 상호 신뢰에 기반한 아주 느린 대화지요. 저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상의 대화가 있다면 바로 이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그 안에 담긴 심정을 헤아릴 수 있는 언어의 아주 더디고 성긴, 그러나 밀도 높은 교환 말입니다. 어쩌면 개와 인간의 소통이라는 것이 우리가 주고받는 편지와도 닮아 있는 것 같아요.
이번 여름부터는 원고 일을 줄이고 저의 개인적인 사안들에 대해 좀 더 집중해보려고 했는데 균형을 잡는 게 엄청나게 어렵다는 걸 매일 새롭고 처절하게 느낍니다. 지난주에 제출했던 중간 페이퍼는 본문을 작성하는 데에만 꼬박 스물 네 시간이 걸렸고, 와중에 발목뼈에 금이 가는 바람에 깁스 생활도 해야 했지요. (지금은 제멋대로 풀고 지냅니다만 통증이 만성화 되는 것 같아서 조금 짜증스럽습니다…) 인생이 사방으로 죄다 막혀버린 큐브 속에 있는 것 같아요. 어느 날 밤에는 글을 쓰다 말고 갑자기 서재 정리를 해서 팔십 권이 넘는 책들을 모두 갖다 버렸습니다. 사십여 권 정도는 중고책방에 팔 요량으로 따로 모아두었고요. 그 직전 주에는 삼십 권을 버렸었고요. 요즘엔 분노가 치밀어 오르면 책을 버리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저의 집에 한 번이라도 와본 이들은 제 서재가 지옥도(地獄道)라는 이름으로 불린다는 것을 알겁니다. 과장이 아닙니다. 온갖 책들이 처참하게 여기저기 쓰러져 있고 사람이 지나가기도 어려울 지경이에요. 지난 몇 주간 저를 휩쓴 분노 덕에 다행히 그 방에 이제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길이 생겼습니다.
쓰면서 읽고, 일하면서 돌보는 삶은 얼마나 어려운가요. 이렇게 말로 적고 보니 참 별 것 아닌 것 같습니다만 어마어마하게 어렵다는 걸 다들 아실 겁니다. 저 네 가지 일 중 하나만 수행한다 해도 삶이 제대로 유지되고 있다는 감각을 확보하기란 마치 하늘의 별 따기와 같다는 걸요. 하지만 저희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이 세계의 이름은 사바(娑婆)이고 그 뜻은 ‘견딘다’는 거랍니다. 그러니 다 받아들이라고……. (참고로 저희 집안은 모태 가톨릭입니다.) 얼른 호두나 데리고 본가로 내려오라 하시네요. 허허. (하지만 호두가 나머지 한 달 분량의 심장약을 다 먹기 전에는 비행기를 탈 수가 없어요.) 저는 요즘 제가 평생 회피해오던 어떤 벽과 완전히 대면하고 있습니다. 무섭고, 두렵고, 도망치고 싶습니다. 삼십육계에 따르면 줄행랑도 하나의 계책이라는 말을 여러 번 떠올리지만, 그 벽이 너무 오래 열리지 않아서 그렇지 실은 하나의 문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는 박찬욱의 말도 연이어 떠오릅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고민을 하면서 작업을 하다가 문득 침대 밑에 머리를 박고 소처럼 누워 쿨쿨 자는 호두를 봅니다. 저렇게 무방비한 상태로 편안하게 자기 위해 너는 어떤 시간을 지나왔을까… 헤아릴 수 없는 가늠을 멋대로 해보면서요. 꿈에서 비행기라도 타는 건지 네 발을 파닥거리거나 가끔 입을 쩝쩝거리는 걸 보면 어이가 없습니다. 부럽기도 하고요. (너는 발이 네 개인데 나보다 글을 더 많이 쓸 수 있지 않을까… 대신 좀 써주라…) 다른 편안한 곳을 제쳐두고 굳이 제 옆에서 저러고 자는 걸 보면 웃기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편지는 언제나, 당초 생각한 것보다 길어집니다. 심리상담사를 방문할 때 오늘은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고민스럽다가도 막상 앉으면 나도 모르게 이야기가 이래저래 새어 나오는 것과 비슷할까요. 그래서 일단 마무리된 편지는 다시 읽으면 안 된다는 게 제 신조입니다. 다시 읽으면 그 편지는 부칠 수 없습니다. 부끄러움에 곧장 지워버리고 싶으니까요. 사실, 그렇게 발송하지 못한 편지도 꽤 여럿입니다. 이 편지는 발송하기로 약속한 것이므로 두 번 읽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거친 문장과 재미없는 내용들은 그러니 어쩔 수 없습니다. (호두가 자다가 갑자기 뒷발로 귀를 마구 긁네요. 느낌만으로도 지루한 편지라는 걸 직감하나 봅니다.)
호두와 산책을 하다보면 제가 가고자 하지 않던 길로 가게 되고, 우리 동네에 이런 멋진 곳이 있었나 탄성을 내지를 만큼 대단한 곳을 발견하게 되기도 합니다. 이른 아침에 산책을 하면 공사장의 인부들이 다같이 모여 힘차게 국민체조를 하는 장면을 보게 되고, 밤새 계절이 만들어 둔 낙엽더미의 찬란함을 신선한 공기와 함께 만끽할 수 있습니다. 혼자 살았더라면 저에게는 도착하지 않았을 풍경들입니다. 오며 가며 호두에게 인사를 건네는 동네 사람들과 안면을 트고 매일 안부를 나누는 사이가 된 것도 신기합니다. 동네의 페이스북 같은 장소인 수퍼 앞마당에는 호두의 이름이 호두라는 걸 알면서도 굳이 매번 ‘보리야!’ 라고 반갑게 인사하시는 할아버지가 계시는데 (저는 그분을 ‘보리 아저씨’라고 부릅니다.) 알고 보니 동네에서 산책하는 모든 개들에게 ‘보리야!’ 하고 인사를 건네는 분이시더라고요. 한번은 그 할아버지의 친구가 “형, 너는 왜 나랑 이야기 하다 말고 개한테 먼저 관심을 주냐? 그러면 몹시 섭하다.”고 궁시렁 거리는 것도 지나가다 들은 적 있습니다. 이런 시시콜콜한 사람사는 면모들이 일상 속으로 들어오게 된 것도 다 호두 덕분이지요. 낯선 존재와 함께 산다는 것은 이런 즐거운 우연들을 기꺼이 수락하는 일인 것 같기도 합니다.
바야흐로 십일월입니다. 여러분의 지난 계절들은 어땠나요? 그리고 올 가을은 어떤가요?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면서 크고 작은 일들을 나눠보는 건 어떨까요. 편지는 어쩔 수 없는 일방적인 고백이지만, 분명 받는 이도 그 일방적인 마음에 설레고 기뻐할 것이 분명합니다. 응답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한 쪽의 고백에 그칠 테지만 (그래도 충분히 즐거운 시간을 만끽하겠지만), 만약 운 좋게 답장이 온다면, 그것은 아주 느린 시간을 통과한 서로의 대화가 아니겠어요? 답신을 기다리는 시간 또한 여러분의 행복일 터입니다. 밤 10시의 라디오 디제이가 할 법한 낯간지러운 멘트지만, 올 가을, 여러분도 미뤄뒀던 편지 한 통을 써보는 건 어떨까요? 라는 말로 오늘의 편지를 이만 줄이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