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아주 중요하게 고민하지만 그러나 결국 해결하지 못하고 새해를 맞이하게 되는 문제가 있다. 바로 각종 노트에 흩어져 있는 내용들을 어떻게 하나로 동기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고민이다. 떠오른 생각들과 매일의 일기, 그리고 공부하면서 기록한 것들이 여기저기 다른 곳에 흩어져 있다. 물론 각각은 알맞은 장소에 기록되어 있지만 오프라인과 온라인을 넘나드는 여러 노트를 하나의 공간 안에 모아둘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미련 가득한 고민은 잘 떨쳐지지 않는다. 방법이 잘 마련되지 않을 때에는 왜 이것을 해결해야 하는지에 대한 목적을 생각하게 되는데 사실 반드시 꼭 정리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흩어진 것들은 흩어진 대로 그곳에 각각 편안하게 잘 있겠지만 일 년에 한 번쯤 그 모든 기록들을 연말정산 하듯 늘어놓고 살펴보고 싶은 욕구가 찾아오기 때문에 난감해질 따름이고…… 매년 돌아오는 명절처럼 고민스러워진다.
모든 기록들을 한데 모을 수가 없다면 각각의 기록들이 어디에 어떻게 보관되어 있는지 정리해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까? 하는 생각으로 내가 가진 노트들을 정리해보려 한다.
1. 로이텀 모눈 노트
이십대부터 썼으니 십년 좀 넘게 계속 써오는 노트다. 비슷한 노트류로 몰스킨에서 나오는 것들이 있고, 나도 처음에는 몰스킨으로 시작했으나 종이 비침이 심하고 조금 얇은 느낌이 들어서 두 권쯤 쓰다 로이텀으로 바꾸었다. 헤밍웨이가 창작노트로 썼다는 광고를 어디에선가 보고 (출처와 기억도 불분명) 오오, 그렇다면 나도? (라는 매우 비개연적인 발상으로) 하고 시작했지만 노력해도 끝내 오래 쓸 수는 없었다. 특히, 만년필 사용자들은 로이텀이 아주 만족스러울 것이다. 만년필 사용자들에게 흔히 미도리 사에서 나온 종이를 추천하는데 둘 다 써본 결과 미도리도 무난하지만 로이텀 종이가 좀 더 튼튼하면서도 매끄럽게 잘 써진다는 평을 주고 싶다.
어쨌든, 사이즈는 두 가지, A5와 A6 두 가지를 쓰는데, 크기에 따라 다른 것을 적는다. 큰 것에는 원고나 과제를 쓰기 위한 최초 단계에서 떠오르는 아이디어들을 정리한다. 그래서 내지는 항상 모눈을 쓴다. 줄 노트에는 어쩐지 무언가 정돈된 내용만을 적어나가야 할 것 같아서 엄두를 내지 못하고, 무지 노트는 그 어떤 흔적도 없는 백지가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지나친 광활함으로 느껴져서 마음이 어려워진다. 정사각형의 모눈은 대각선을 함축하고 있어서인지 여기저기로 선을 그을 수도 있고 그렇게 손끝이 좀 자유로워지면 도형이나 그림도 아무렇게나 그릴 수 있다. 줄이 맞지 않게 삐뚤빼뚤하게 글자를 마구 갈겨써도 부담스럽지 않아서 작업 초기 단계에서 이런 저런 생각들을 두서없이 늘어놓기에 편한 지면이다.
작은 사이즈에는 영화나 연극, 전시 등 활자로 작성되지 않은 텍스트를 본 기록을 남긴다. 매번 기록하는 분량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물론 수십 페이지를 쓸 정도로 길어질 때도 있지만 그건 그것대로 또 즐거우니까. 몇 년 전 데이비드 호크니 전시장에 갔을 때 썼던 게 그렇다.) 부러 작은 크기의 노트를 쓴다. 그렇게 쓴 게 벌써 다섯권이 넘는다. 봤던 모든 것에 대해 적지는 않지만 생각이 좀 많아질 때는 노트에 쓴다. 사이즈가 작으니 가끔 심심풀이로 꺼내 들춰보기에 편하다.
2. 포켓 사이즈 수첩
흔히 문방구에 가면 이천원 정도에 파는 스프링이나 무선제본이 된 작은 노트들은 거의 매일 가지고 다닌다. 생각해보니 가장 오래 쓴 노트의 형태가 이것인 것 같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알림장을 대체할 노트로 골랐던 것인데 이유는, 교복 치마 주머니에 알맞게 들어가는 유일한 사이즈였기 때문이었다. 언제 어디서든 쓸 수 있다. 친구들이랑 길을 걷다가도 해야 할 일이 생각나면 적고, 뭔가 빠뜨린 것이 있었다는 걸 깨닫는 즉시 기록할 수도 있고. 스마트폰을 쓰고 나서는 일정이나 과제를 대부분 달력 어플에 기록해두지만 최소한 중고등학교 시절 육 년을 내내 함께한 노트. 최근에는 동네 책방들에서 파는 작은 노트를 대신 들고 다닌다. 가볍고 작아서 언제 어디든 외출할 때마다 들고 다닐 수 있다. 자주 쓰는 노트는 부담스럽지 않아야 한다. 노트가 사람에게 부담을 준다는 말이 조금 웃기게 들릴 수도 있지만, 우리는 자주 매체 앞에서 주눅든다. 아무리 많은 글을 써도 백지의 공포는 매번 새롭다.
3. 온라인 블로그
디지털 기계로 하는 기록이 간편한 이유는 전적으로 키보드 탓인데 빠르게 많은 양을 남겨야 할 때 컴퓨터 앞에 앉는다. 또는 마구 몰려드는 생각이 휘발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 때 급히 적어둔다. 비공개 기록들이 많고 가끔 일기도 전체 공개로 발행하지만 대부분 별 쓸데없는 말이고 읽는 사람보다는 쓰는 나에게나 의미 있는 것들이 많다. 로이텀 노트처럼, 블로그도 십 년이 넘은 익명의 개인 블로그가 있는데 거기에는 한참 병원을 다니던 시절의 환자 일기가 수북이 쌓여 있다. 말하자면 내 이십대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때는 사진 일기도 자주 썼는데 지금은 전혀 기록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 (아니, 굳이 기록한다면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짤막하게 올리고 끝낼) 아주 사소한 것들이 매우 귀중한 보물처럼 적혀 있는데, 가령, 존 메이어의 곡을 처음 듣고 광화문 핫트랙스에서 산 앨범이나, 막 발간된 명탐정 코난 단행본에 몹시 기뻐하며 찍은 책 사진, 스타벅스 시즌 한정판 음료를 시켜놓고 뿌듯해 하는 커피 테이블 사진 같은 것들이 있다. 나이가 든다는 건 사소한 기쁨으로부터 멀어진다는 것일까? 나이 든다는 것 자체가 그렇게 된다는 건 당연히 아닐 것이다. 다만 내가 그렇게 변한 것일 뿐. 아니, 생각해보니 ‘사소하고 중요하고 아름다운 것’들의 정의가 달라진 것 같다. 핸드폰 갤러리를 슥 보니 키우는 개 사진과 나무 사진들이 많다. 커피 사진도 이제는 예전만큼 잘 없다. 구체적인 개체나 대상보다는 전체의 풍경과 분위기를 더 담고 싶어지지만, 그렇지만 카메라 렌즈로는 언제나 그것들이 훼손되고 결국 내 손에 남는 것은 애초에 내가 사랑한 그것의 희미한 윤곽만 남을 뿐이니까 점점 찍지 않게 된다. 담기지 않는 것들은 그저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두고 차라리 내 몸에 스며들기를 바라며 맨눈으로 바라보고만 있게 된다.
4. 아이패드 굿노트
코로나 시기부터 쓰기 시작한 노트. 학교 수업이 죄다 비대면 줌(zoom) 수업으로 바뀌는 바람에 수업 자료가 모두 PDF로 제공되었고 일일이 그걸 종이로 출력할 수 없던 나는 결국 아이패드 사용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도 아이패드는 유용하게 쓰고 있지만 (가방 무게, 어깨 통증) 아직도 적응이 안 된다. 이 불편함은 이북(ebook)이 가진 치명적인 한계일 텐데, 그리고 바로 이것이 종이책을 영원히 사라지지 않게 만드는 것일 텐데 그건 손으로 텍스트의 부피를 전혀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읽고 있는 이 내용이 텍스트 전체의 분량 중 어디쯤에 위치하는지, 전개의 진행도를 고려했을 때 어떤 흐름 속에 있는지 전혀 파악이 안 된다. 검지로 아무리 열심히 화면을 넘겨도 눈만 어지러워질 뿐… 하지만 최대한 종이 보유량을 줄여야 하는 처지에서 디지털 형태의 문서로 노트를 작성하고 보관할 수 있다는 건 참으로 다행이다. 다만, 이 경우 폴더 정리를 시작부터 잘 해두어야 편한데 다행히 나는 폴더 정리를 좋아하기 때문에 연도별, 시기별, 작업 내용별로 분류해두어서 정리할 것들이 밀려있진 않다. 한때 클라우드 서비스를 불신하며 불안에 떨기도 했지만 이제는 뭐, 그러려니… 어쩔 수 없으려니. 이 경우 기록의 목적은 영구적인 보관이 아니라 내용의 체화를 촉진하는 용도니 감안하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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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강 이 정도인 것 같다. 외에도 미도리에서 나온 트래블러스 가죽 노트나 외부 강의를 진행할 때 사용하는 작은 수첩 등이 있는데 그것들은 매일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아니어서 제외했다. 사실 하루 중 가장 많이 쓰는 ‘노트’는 포스트잇일 것이다. 번뜩이는 생각들은 그때그때 포스트잇에 가장 빠르게 옮겨 적고 노트에 다시 붙여 정리하기도 한다.
다른 작가님들의 사정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아마 집안 곳곳에 쌓여가는 종이책들은 모두에게 고민거리이지 싶다. 집에 따로 서재를 마련하고자 했고, 거대한 책꽂이도 설치해서 정리하기도 했지만 책들은 계속해서 태어나고 글 한 편을 쓸 때마다 책상 주변에 쌓여서 피사의 사탑들이 생겨나니 속수무책이다. 기록도 마찬가지다. 로이텀 노트들은 이제 다 합치면 열권이 넘어서 세워 꽂아둘 수 없고 가로로 눕혀 쌓아둔다. 사실, 소수의 기록들을 제외하고 많은 기록들은 쓰는 과정에서 그 내용이 나의 몸에 스며들도록 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행해진다. 일기가 그렇고, 하루 일과의 내역을 시간대별로 작성해보는 타임로그가 그렇고, 영화나 전시를 보고 남기는 기록도 그렇다. 사실 쓰고 나면 다시 펼쳐보지 않는 이유는 노트에 적는 순간 실시간으로 우리 마음과 몸에도 그 내용들이 스며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쓰는 과정이 중요하다. 사진은 순간의 감정을 환기하지만 쓰는 과정은 시간을 통째로 우리 몸에다 심어버린다. 그래서 쓴다. 지난호에서 다루었던 이영주의 시 <병속의 편지>의 화자가 들으면 뭐라고 할지 문득 궁금해진다. 그는 기록이 실재의 몸체를 조각내고 도륙한다는 진실을 깨달은 사람이다. 오늘 소개한 기록들은 부러 그 조각들을 만들어내기 위한 기록이라고도 볼 수 있을 테다.
요즘 새로 시작한 기록은 타임로그다. 몇 시에 일어나고, 아침으로 뭘 먹었고, 점심에 커피는 몇 시쯤 먹었는지 그런 것들을 쓴다. 이것은 앞에 말한 과정의 기록과는 조금 다른 용도인데 간혹 오늘 도대체 뭘 했는지 모르겠는 날이 있는데, 그럴 때 타임로그를 보면 아아, 하고 다시 빈 시간 감각이 채워지고 그러면 나는 하루를 그저 허공에 날린 것이 아니라 제대로 살아냈구나 하고 되새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감각의 필요 때문에 쓰는 경우도 있다. 점심까지 기록을 마치고 나면 남은 저녁에 해야 할 일들이 자연스럽게 정리되고, 더불어 하고 싶은 일도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혹자들은 이를 두고 자기 ‘통제’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뭔가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싶은지 알아낼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오히려 이를 자기 ‘발견’을 위한 기록이라고 부르고 싶다. 특히 이번 추석 명절에는 반려견 호두와 서울에서 계속 지낼 예정이므로 타임로그가 더욱 유용하지 싶다. 초침처럼 빡빡하게 흘러가는 반복적인 일상이 아니라 에이포용지 한 다발처럼 뭉텅이로 주어진 시간을 덜 아쉽고 더 재밌게 보내려면 기록이 필요하다. 조금 전에 나는 호두에게 준 닭안심과 내가 먹은 샐러리를 적었다.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아 보이는 것들도 쓰고 나면 특별해진다. 기록의 내용이 특별해진다기 보다 그것들을 지나온 나의 시간이 재발견 된다고 봐야할 것 같다. 어떤 것들은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만 더욱 또렷해지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