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만년필 덕후다, 라고 첫 문장을 쓰려다 이내 포기했으나 그 포기로 인해 나는 결국 첫 문장을 돌려받게 되었다. 만년필을 좋아하는 이유를 열댓 개쯤 댈 수도 있겠지만 하나만 말하라고 하면 촉 때문이라고 말하겠다. 연필이나 기타 펜을 좋아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흑연과 잉크가 종이와 맞닿아 번져나가는 그 가장 마지막의 물성을 좋아한다. 다른 많은 이들은 만년필의 소리 때문이라고도 한다. 물론 사각거리는 특유의 소리도 매력적이지만 내가 만년필 뚜껑을 열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글자를 써 나가면서 손가락, 팔, 그리고 이내 온몸으로 번져나가는 촉각 때문이다.
소리와 촉각 두 가지를 두고 세 번쯤 더 고민해 보았지만 역시 촉각이다. 만년필을 사용할 때 이어폰도 함께 사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어떤 촉은 종이 위를 물 흐르듯 흘러가는 미끄러운 느낌을 준다면, 어떤 촉은 종이와 한 획 한 획 마찰을 거듭하며 작은 전투를 벌이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만년필을 한 자루도 사지 않는 사람은 있어도 한 자루만 있는 사람은 아마 드물 것으로 생각한다. 만년필은 촉의 종류에 따라, 그리고 같은 굵기여도 금속의 물성과 제조 회사에 따라서 아주 다른 글쓰기의 감각을 제공한다. 원고 마감은 대부분 기계식 키보드로 하고, 글쓰기의 감각을 몸이 느낀다기보다 손가락과 손목 관절에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작업을 한다는 느낌이다. 감각의 층위에서 말하자면 원고 마감은 무감각의 감각 속에서 이루어지는 반면 노트에 만년필로 무언가를 쓸 때는 그 순간의 온도와 습도, 몸의 상태를 활자 안으로 최대한 밀어 넣으며 쓴다고 할 수 있다. 만년필은 쓰는 그 순간의 시공간과 나를 한꺼번에 기입한다.
그래서 그런지 키보드로는 쓰지 못할 것이 없지만 만년필로는 쓸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거꾸로 말하면 만년필로만 쓰고 싶은 것이 있다는 말이다. 가령,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쓴 편지를 넣고 밀봉한 봉투 겉면은 언제나 만년필의 몫이고, 마음속에 오래도록 담아두고 싶은 글귀나 아주 특별한 날의 일기 같은 것들이 그러하다. 기록은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시작된 것이지만 어떤 기록은 기억의 힘을 강화하기 위해 행해지기도 한다. 나의 만년필은 후자의 경우를 위해 사용된다. 구청 직원과 통화하며 전화번호를 받아 적기 위해 휘갈겨 쓰는 용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시간의 빛에 바랠지도 모르는 것들을 조금 더 오래 붙잡아 두기 위해 쓰는 걸 말한다. 그러나 모든 기록이 소중한 장면을 남겨두는 것은 아니다. 기록은 오히려 대상을 파괴시키기도 한다. 기록이 쓰는 행위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그렇다. 비가시적인 형태로 몸에 각인되는 시간과 공간의 흐름을 언어화 하여 붙들어 매기 위해서는 그것의 온전함을 필연적으로 얼마간 훼손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시든 소설이든 산문이든 그 무엇이 되었든 활자로 이루어지는 그 모든 것은 그래서 어떤 원본의 파편들이다. 아래의 ‘나’와 ‘그’는 문장의 깨진 조각들 앞에서 각자의 고투를 벌이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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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검은 물질로 만들어졌다고 상상한 이후부터 시간의 꿈을 담고 싶어졌습니다. 병에 담으면 될까요? 긴 시간을 건너왔으니 따뜻했던 밤으로 돌아가고 싶어져서
그는 매일 밤 술을 마시고
병을 모으고
병을 세우고
여기에 오는 모든 사람은 찰랑찰랑한 어둠을 만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병의 입구를 꽉 움켜쥔 채 잠이 들고
나는 이불 밖으로 빠져나가는 무관한 것들을 자꾸만 쓸어 담고
(……)
나는 그 문장에 밑줄을 그었습니다. 다시 지웠습니다. 구약성경은 어떤 종말보다 잔혹해서 병에 담고 싶어지는데
그는 매일 밤 펜을 버리고
문장을 버리고
자신을 버리고
아무것도 쓰지 마. 무관한 것들을 쓰지 마. 돌아올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쓰지 마. 이제는 쓰지 마.
아름다운 것들은 기록되면 파괴되지.
사라질 수가 없지.
그는 연애편지를 이렇게 건네네요. 어떤 사랑도 기록하지 말기를. 영원히 느끼고 싶다면 그저 손이라는 물질을 잡고
병의 입구를 열고
─「병 속의 편지」 (이영주, 『어떤 사랑도 기록하지 말기를』문학과지성사,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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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꿈”을 담고 싶어서 그는 매일 술병을 만든다. 잔을 비우고, 술을 비우고, 병을 세워두고 그리고 “병의 입구를 꽉 움켜쥔 채 잠이 [든]”다. ‘그’가 병에 든 것을 비우며 시간의 용기를 만드는 밤마다 ‘나’는 한편, “무관한 것들”을 쓸어 담는다. 무관한 것들은 무엇인가? 무엇과 무엇이 무관하다는 것일까? 왜 하필 유관한 것들을 버리고 무관한 것들을 모으는 것일까? ‘나’는 문장에 밑줄을 긋는 사람이라는데, 그렇다면 그 밑줄들이 바로 무관한 것들일지도 모르겠다.
한데 ‘그’와 달리 ‘나’는 잔혹한 것을 병에 담고 싶다고 한다. 손으로 포획할 수 없는 말들을 병에 담아 세계의 바깥으로 버리기 위함일까? ‘그’와 ‘나’는 서로 다른 목적을 위해 빈 병을 움켜쥐고 있다. ‘나’가 성경의 문장들에 밑줄을 그어 자르고 그것들을 병 속으로 털어 넣을 동안 ‘그’는 아름다운 “시간의 꿈”을 빈 병에 채워 넣는다. 그가 버리는 것들은 펜과 그 끝에서 태어난 죽은 문장들이다.
발췌한 시는 처음으로 등장하는 명령문을 기점으로 ‘그’가 죽인 문장들은 갑자기 생생하게 살아난다. (“아무 것도 쓰지마.”) “무관한 것들을 쓰지 [말]”라고 하는 이 목소리는 그것들을 쓸어 담던 ‘나’의 모습으로 되돌아간다. 쓴다는 것은 마구잡이로 쓸어 담는 것과 달리 정갈하게 말을 고르고 배치하고 정돈하는 일. 날카로운 펜촉 끝에 의해 잘리고 훼손되느니 그렇게 기록하지 않고 그저 주머니에 모조리 쓸어 담으라고, 그래서 그 무관한 것들을 다치지 않게 하라고, 그것이야 말로 영원한 기록으로 가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이다. 어떤 기록은 소중한 것을 파괴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사랑도 기록하지 말기를”이라는 신성한 구절 앞에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든 만년필을 내려놓는다.
언어가 실재를 도륙한다는 헤겔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신분석학적 접근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철저히 경험적인 차원에서의 접근이 필요하다. 가령, 우리가 행복했던 하루를 보내고 일기를 쓰기 위해 무언가를 열심히 적었다고 가정해보자. 그 일기에 과연 내가 느낀 행복이 오롯이, 그대로 담기게 될까? 하루동안 느낀 좋은 것들을 글자로 적는 순간 그것들은 사라진다. 여름에서 가을로 접어드는 미세하게 달라진 온도의 바람과 흔들리는 나무 잎사귀 소리, 내 눈을 바라보며 웃던 개의 웃음과 입가의 침, 아이스커피의 맛 같은 것은 어떻게 기록으로 전해질 수 있겠는가. 적는 순간 모두 사라지고 만다. 그래서 시인은 “아름다운 것들은 기록되면 파괴되지”라고 썼을 것이다.
한데 뒤이어 그는 “사라질 수가 없지”라고 덧붙인다. 응? 파괴되기 때문에 사라질 수가 없다니. 여기서 우리는 다시 “무관한 것들”로 돌아간다. ‘무관하다’는 동사에 연결되는 목적어는 생략되어 있기에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시는 생략을 통해 제 날개를 펼치니까. 대개 무관하다는 것은 ‘나’와 무관하거나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목적으로 받는다. 그렇다면 시의 화자가 말하는 무관함은 우리가 흔히 삶에서 중요하다고 말하는 과업이나 일 따위와는 상관없는 것들이라고 짐작해볼 수 있다. 아름다운 것들은 우리가 삶의 목적으로 추구하는 현실의 목표들과는 언제나 무관한 것들이고 어쩌면 바로 그 무관함 때문에 역으로 아름다워질 수도 있을 테다. 고료를 받지 않고 쓰는 글을 쓰면서 가장 자유로워지는 것처럼 말이다. 기록되는 순간 그것의 오롯한 원본성이 파괴되고 사라질 수 없는 것으로 박제된다면 그 아름다운 것들은 ‘그’가 버린 문장들처럼 죽은 글자가 되고 만다. 그러니 쓰지 말라고 명령하는 화자는 살아있는 아름다운 것들을 죽이지 말라는 문학의 황금률을 엄숙하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것들을 영원한 것으로 만들고 싶다면 언어의 칼끝으로 그것들을 도려낼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손으로는 결코 모두 다 붙들 수 없는 “물질”로서 덩어리째 받아들라고, 심지어 그것을 만지려는 손조차 하나의 물질이라는 것을 상기하면서 다만 병의 입구를 열라고 말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병 안에 아름답고 어두운 그 물질들을 모조리 담아두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것을 뜨려는 작은 시도를 할 수 있다는 것만을 알아두라고 말이다.
그래서 기록 가능한 모든 수단과 매체는 칼이다. 우리가 경험한 것을 자르고 편집하여 붙들어두는 박제의 칼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흘러넘치던 사랑의 순간을 우리는 어떻게 감히 그대로 재현할 수 있을까? 술 없이도 취한 것처럼 끝없이 이어지던 대화를, 말없이 서로의 빛을 주고받던 두 사람의 눈동자를, 파도처럼 휘몰아쳐 소리 칠 수도 없던 격정의 순간을 도대체 어떤 언어로 손상 없이 포획할 수 있단 말인가. 칼끝에서, 펜촉의 끝에서 우리의 삶은 매순간 해체된다. 글을 쓰는 사람은 그러한 불가능성을 알면서도 매번 펜을 집어 들어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재현을 향해 다가서는─다만, 병의 입구를 열어두는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최근 몇 달 동안 나는 만년필의 잉크를 한 번도 충전하지 않았다. 잊고 싶지 않은 순간들은 무수히 많았지만 기록으로 재현된 그 온전하지 않은 장면을 바라보느니 차라리 내 머릿속에서 시간과 함께 서서히 바스라지며 퇴색되는 온전하게 살아 있는 기억의 물질들을 몇 번이고 재생하는 쪽을 택했다. 점점 더 일기를 적게 쓰게 되는 것도 그런 이유인 듯하다. 이 삶이 온몸으로 나를 통과하기를 매일 소망한다. 그것이 고통이든 행복이든 사랑이든 분노든, 시간이라는 불가항력에 의해 파괴되고 종국에는 사라질지언정 단 한 톨의 유실 없이 있는 그대로의 그 경험들을 몸속에 간직하고 싶다. 마개가 열려 있는 무수히 많은 병들이 서 있는 것을 바라본다. 안에 든 것들이 기화되어 공중으로 흩어져 언젠가는 결국 빈 병에 불과하게 될 지라도 그것은 훼손되지 않은 채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와 함께 살다 간 것들이 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