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다는 말은 함부로 남발할 말이 분명 아니지만 그 한 마디를 하지 않았을 때 발생하는 부작용은 그것보다 훨씬 더 크다. 진심이나 진정성이라는 말과 함께 아무리 자신의 입장과 마음을 설명한다 해도 ‘그러니 내가 미안해’라는 말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그 모든 ‘진심’은 그저 거대한 자기 합리화와 배출의 시간에 불과하고 말 것이다. 미안하다는 말은 패자의 언어가 아니라 용기 있는 자의 말이다. 자신의 선택과 행동, 언어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로부터 비롯한 것들임을 인정하고 그에 뒤따르는 효과에 대한 책임 역시 ‘나’에게 있음을 받아들이는 말이다.
사람은 자신이 평생 살아오며 설계해 둔 프레임 안에서 세상과 타인을 바라보고 심지어 자기 자신 또한 그것을 통해서 바라보므로 관계 맺기의 어려움은 매우 다채롭게, 매번 늘 낯선 새로움 속에서 발생한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존재 자체를 온전히 완전하게 이해한다는 것이 아니라 현재 나와 맺고 있는 그 사람의 아주 일부를, 내가 만든 틀이 아닌 그 사람의 틀 속에서 이해하며 내 세계로 다시 틈입시키는 일이다. 그(그 부분)를 이해하는 순간에 내가 만든 틀은 꼭 그만큼의 부피만큼 깨어지고 조각나 부서진다. 달리 말하면 매끄러운 자아는 균열이 생겨 다치게 된다 표현할 수도 있겠으나, 역설적으로 우리는 그만큼 흠집이 날 때 더욱 건강해지는 것이다. 그와 내가 최소한 그 지점에서 만큼은 동등한 점이 되어 하나의 선분을 그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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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 나의 내밀한 것들을 공유하고 쓸데없이 시간을 함께 허비하던 친한 이가 등을 돌린 적이 있었다. 그는 내가 의지하고 믿는 몇 없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러다 둘 사이에 어떤 오해가 발생했고 그 과정에서 그는 그저 말없이 멀어지기를 택했다. 다른 이들에게서 그가 나에 대해 나쁜 말을 하고 다닌다는 것도 전해 들었다. 그때 나는 몹시 분개했지만 그래도 그 사람을 끝내 미워할 수 없었다. 그가 세워둔 논리와 해석의 틀 안에서는 사실과 무관하게 내가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겠구나 하고 납득했기 때문이다. 내가 먼저 다시 연락했을 때 그는 언제쯤 다시 보자 답했지만 그가 말한 그 시기는 이미 오래 전에 지나버렸고 그는 다시 연락해오지 않았다. 얼마 전에 만난 누군가로부터 그가 여전히 나와 관계의 밀당 같은 것을 하고 있으니 내가 더 이해하는 식의 말을 들었을 때에는 마음이 더욱 착잡해졌다. 그의 서투름이든, 미숙함이든 여하튼 그의 어떤 결핍으로 인해서 내가 다가간 만큼 그가 나를 끌어당기지 않는 그 사실에 대해서도 내가 다시 한 번 더 이해해야 한다는 사실은 그와 내가 동등한 관계가 되는 것을 막아서기 때문이다. (나도 미숙하고 모자란데! 나라고 뭐가 그리 다를까…) 어떤 관계는 내가 상대방보다 몇 갑절 더 노력하고 이해해야 유지되기도 한다. 왜 모르겠는가. 그러나 내가 먼저 다가선 만큼 그쪽도 한 발 더 나와주길 바라는 마음은, 나 역시도 그에게 이해받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마음에 갇혀 상대의 마음을 건너다볼 여유가 없는 사람들 틈 속에서 ‘나’는 계속해서 조금 더 너르게, 너르게 이해해야만 한다. 내가 내 안경알을 조금씩 깨고 나 아닌 그 바깥의 것들을 볼 수 있게 해주는 경험들은 나를 성장시켜주는, 결과적으로 ‘좋은’ 일이 될 것이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냥 나도, 나 역시도 누군가가 조금 더 너른 품을 벌려 나를 품어주기를 바랬던 것 같다. 그걸 바란 이유는 내가 그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던 것이고. 관계 자체를 유지하는 방법을 모르지 않는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렇게 부담이나 무리인 것도 아니다. 다만, 관계가 원만하다는 그 바람직한 결과 외에 그 관계에서 나 역시도 이해받고 싶었던, 챙김 받고 싶었던 욕망은 여전히 문제가 된다. 내가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그런 너른 이해의 방식이다. 하지만 뭐, 나라고 모두에게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었을 리도 없겠지만, 그래도… 이해받고 싶다는 욕망. 어쩌면 그 마음이 계속해서 ‘나’를 ‘너’와 연결시키는 인력일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므로 나는 이 한 줄기를 끝내 포기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한 해, 두 해가 지나면서 ‘어른’으로 살다보면 그 모든 마음을 챙기기란 어려운 일이니까, 그저 말을 줄이고 마는 선택들에 대해서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어쨌든 그는 내가 끝끝내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므로, 연락이 없던 기간동안 그가 원망스러웠다기보다는 그저 잘 지내나, 얼굴 보고 싶네 하는 생각이 들었던 사람이므로 내가 먼저 연락하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가 내게 이렇게 연락을 하지 않는 상황에서 내가 먼저 연락을 건네는 식으로 문제가 해결될 때 생겨나는 염려도 있었다. 그가 내 ‘안경’을 써보려 했을까? 내 선에서는 알 수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실제로 그가 그랬다 하더라도 그가 표현하지 않는 한 나는 알 방도가 없다.) 내가 아무리 그를 향해 다가간다 하더라도 그가 내 쪽으로 조금도 오길 원치 않는 상태라면… 그 모든 노력은 아무 쓸모가 없을 터였다.
친밀한 관계는 말하지 않아도 많은 것들을 서로 느끼고 보는 사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어떤 것들은 부러 언어를 통해 바깥으로 공표되어야 한다. 내가 그를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이, 그가 나를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이 단지 선의의 추론과 납득에 의해서가 아니라 명확하고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의 형태로 서로에게 도착했을 때 생겨나는 단단한 힘이 있다. 관계를 더욱 잘 유지하고 싶은 마음, 그가 더욱 소중해지는 마음.
실상 내가 바란 건 단 한 마디였다. 너는 괜찮아? 좀 어때? 너도 힘들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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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날이 만나게 되는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사건들 속에서 한 겹씩, 삶은 달걀에서 벗겨내는 하얀 껍질의 두께만큼 세계가 새로워진다. 마치 영화관에 앉아 있는데 스크린이 옆으로 조금씩 계속 더 늘어나는 걸 보고 있는 기분이다. 어제는 없던 것들이 오늘 출몰한다. 장마가 막 끝난 후의 두꺼운 뭉게구름들이 하얗게 피어오르고 매미들이 가열차게 울고 아스팔트에서 삼십오도짜리 열기가 솟아오르면, 나는 나날이 한 뼘씩 줄어든다. 작아진다. 실제로 삶이 확장되기도 할 터이지만 내가 작아짐으로써 세상이 넓어지는 효과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아주 작고 사소한 존재들이면서 바로 그런 방식으로 강해진다. ‘나’라는 자아가 얼마나 작은지 깨달으면서 ‘너’를 이해하게 된다. 문학이 나를 단련시키는 이유가 있다면 바로 그 한 줄의 사실을 전해주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너’들과 어울려 살아가게끔 하는 힘이라는 것도. 우리는 작아지는 성장을 한다. 그건 타인의 안경을 써보는 일과도 같다. 도수가 전혀 맞지 않아서 명확해 보이던 사물들이 어지럽게 보이고 다른 크기로 변모하는 것도, 비록 그 시야가 일시적인 찰나의 광경에 불과할지라도 그러한 경험들은 좋음의 차원을 넘어서 필요의 차원에 있다. 거절당하는 경험, 이해에 가닿지 못하고 멀어지는 관계들은 성공과 실패라는 조악한 도식으로는 견인될 수 없는 불가해한 이해 속으로 우리를 밀어넣고, 바로 그때 우리는 세상을 보고 있던 우리의 시력이 단지 ‘나’의 것이었을 뿐임을 경험하게 된다. ‘나’의 것이 깨어질 때 ‘너’에게로 넘어갈 수 있다. 삶을 제대로 산다는 것은 내 주변의 무수히 많은 안경들을 써 보는 일이고 그래서 산다는 게 이토록 어지러운 일일 수밖에 없음을 조금씩 알아가는 듯하다. 적어도 내가 ‘나’의 세상에만 머무르고 싶어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누군가가 보기에 오늘 여기에 쓰인 나의 소회는 상당히 불편할 수도 있을 테다. 특히 에세이를 읽을 때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어지러운 마음을 조금이라도 말끔하게 해 줄 개운한 이야기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세상이 그렇게 간단명료하던가? 복잡하고 어지럽고 문장과 단어로 다 담기지 않는 것이 사람과 사람이 만들어 가는 세상이다. 각자의 맥락이 있고, 각자의 안경으로 보는 서로 다른 상황이 있고, 그런 이들이 원하는 각자의 욕망이 있다. 그런 것들이 동시에 모두 충족되면 참으로 좋겠으나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아서,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한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안경을 기꺼이 써 보고 싶은 것이다. 그게 내 시야를 마구 어지럽힌다 해도 말이다. 어쩌면 누군가가 보기에 이런 마음은 다소 건방질 수도 있고, 이 또한 나의 오만이라고 비대한 자아의 단면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테다. 그럴지도 모른다.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은 만약 이러한 마음이 좁디좁은 이기심이라면 그것이 얼른 깨어지길 그리고 내게 새로운 풍경을 보여주기를 기도하는 일뿐인 것 같다.
때로 우리는 고립된다. 그건 우리가 여러 존재들 사이에서 살아가기 때문인 것 같다. 애초부터 혼자라면 그런 소외감이나 고독은 이토록 유의미하게 크게 다가오지 않을 것 같다. 내가 그들에게서 바라는 건 그들이 나의 시력에 맞춰주길 바라는 것이 아니다. 그냥, 내가 쓰고 있는 안경이 그가 쓰고 있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것임을 한 번쯤은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이다. 글을 발행할 때마다 솔직한 심정을 쏟아내지만 오늘은 유난히 조금 더 날 것의 마음을 드러낸 것 같다. 피부와 근육, 그 아래에 숨어 있는 것을 드러내 보이는 것은 쓰는 사람에게도 그리고 읽는 사람에게도 어느 정도의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매번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싶어지는지 모르겠다. 그냥 그렇게 생겨먹은 인간 같다.
그래서 나는 미안함을 느낀다. 내 안경으로는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에 대하여, 그것들을 놓친 것에 대하여 미안하다. 그리고 그 미안함은 마땅히 상대방에게 어떤 형식으로든 전달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미안하다는 말은 내가 ‘너’의 입장을 미리 생각하지는 못했을지언정 사후적으로라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마음의 표현이다. 귀책사유가 더 많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미안하다고 한다고 해서 내가 더 잘못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어떤 사람은,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 하는 사이라면 그럴 바에야 멀어지라고, 그게 속편하다고 말해주기도 하지만 글쎄, 그게 정말 최선일까? 오래된 물건에는 세월의 흔적이 있다. 손때와 작은 흠집들, 펜 자국 같은 것들이 그 물건에 시간과 공간의 힘을 불어넣는다. 언제나 새 것 같은 물건을 원한다면 버리는 게 답이겠지만 나의 수많은 순간을 함께 경험한 물건이라면 그런 작은 생채기들은 오히려 그와 나를 다른 이들로부터 구별지어 주는 배타적인 마음의 역사를 반증하는 관계의 흔적이 될 테다. 상처가 많은 시대다. 어느 순간부터 유튜브에 ‘손절해야 할 사람의 기준’과 같은 제목의 영상들이 많아졌다. 물론, 정말로 끊어내야 할 관계가 있다. 사람을 이용가치로 재단하고 도구로 사용하거나, 착취하는 사람과는 멀어져야 한다. 그게 맞다. 하지만 우리가 서로 좋아하기 때문에 저도 모르게 마음을 다치는 관계라면, 그 부위를 도려낼 것이 아니라 연고를 바르고 반창고를 덧대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걸 해줄 수 있는 건 ‘나’가 아니라 ‘너’다. ‘나’는 너에게 ‘너’이고 ‘너’는 또 다른 ‘나’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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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에 만나요 || 최리외 x 전승민
2023. 7. 30 meetusonfriday@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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