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눈앞에 대 본다. 수없이 많은 기스, 언젠가 베개 혹은 이불에 뭉개지며 생겼을 얼룩, 빗물이 튄 흔적, 심지어 손가락 지문 같은 자국도 있다. 안경 좀 닦아라. 친구들이 애정 어린 핀잔을 건네는 것은 그들의 눈과 내 눈 사이의 투명한 장막이 얼룩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대로 보이냐?
눈을 고쳐 떠도 눈물 자욱이 어른거리는 시야를 깨끗이 닦아낼 마음이 내게는 대체로 없는 편이고, 보드라운 천을 가지고 다니며 때마다 우아하게 꺼낼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 무슨 재질의 옷을 입고 있든 대강 입김을 불어 슥슥 닦은 뒤 얼룩이 지워졌나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고 다시 쓴다. 어느 겨울, 아트선재센터에서 전시장에 들어서기 전 김 서린 안경을 무심히 닦다가 문득, 안경 닦는 법이 없는 사람에게 주변 사람들이 핀잔 주는 내용으로 시를 쓰기도 했다. 그 시는 어디에 구겨 던져 놓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순간의 날카로운 감각만큼은 여태껏 남아 있다. 흐린 눈, 명료하지 않은 시선을 고집스레 옹호하고 싶었던 내 안의 모호한 욕망까지도.
도마야, 너는 보아야 믿느냐. 초등학교 시절 성당의 여름 캠프에서 누군가 낭송했던 구절을 때때로 떠올린다. 너는, 보아야, 믿느냐...... (내가 – 너를) 본다는 것, 시선이라는 권력을 기꺼이 거머쥐고서 낄낄대며 대상을 훑고 함부로 별점 남기는 데 익숙한 사람만큼은 되고 싶지 않았다. 눈으로 보지 못하는, 보이지 않는 세상에 자연히 이끌렸다.
책이라는 매체에 담긴 이야기의 세계는 눈으로 읽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다(눈으로만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주장에도 미미한 반기를 들고 싶다. 묵독보다 훨씬 이전에 낭독이 있었음을). 읽는 자가 읽히는 것을 상상해야만 페이지를 넘길 수 있으며, 때로는 내면의 눈까지도 꼭 감은 채 목소리를, 혹은 책의 가장자리에서 들려오는 온갖 소리들을 떠올려야만 안으로, 혹은 한복판으로 들어설 수 있는 이야기들도 있다.
무작위적인 길거리 소음, 어느 가게 앞 어수선한 공기, 깊은 숲속 생물의 소리, 비와 천둥 같은 날씨의 소리들. 외국어가 난무하는 이국의 골목들과 주인공이 머무는 퀴퀴한 호텔의 오래된 선풍기 소리, 폭탄 터지는 소리, 사랑하는 이의 심상치 않은 기침 소리, 어둠 속 발자국 소리, 어린 아이가 듣는 시계 초침 소리, 우유 배달부의 외침과 마차의 종소리, 그러니까 규칙 없이 분절되고 끝 모르게 늘어지는 모든 소리들이 종이 위에 언어를 경유해 펼쳐질 때, 그것은 눈으로 읽히는 단어만이 아니라 지극히 공감각적인, 때로는 초감각적인 심상을 불러일으키는 무언가가 된다.
'금요일에 만나요' 메일링을 시작한지도 어느덧 1년. 새로운 키워드로 뉴스레터를 '혁신'해보자며 승민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사물을 나열했다. 읽기와 쓰기에 관한 사물, 우리 일상에 가까운 사물. 담배(이미 다루었고 각자의 글에 우리는 특별한 애착이 있다), 커피, 수첩, 만년필, 가방, 운동화, 화분, 반지...... 그리고 안경. 안경에 관해 써보자는 제안을 하며 나는 이것저것 이야기했던 듯하다. 독서에 관해 쓸 수 있겠지? 세상을 보는 방식에 관해 은유적인 이야기를 건넬 수도 있을 테고. 정작 내게 떠오른 몇 개의 장면은 읽기와는 무관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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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눈이 너무 나빠 군대를 안 갔다. 마이너스 22. 마지막으로 시력검사를 했을 때가 십수 년 전이니 아마 세월이 흐르며 그보다 훨씬 나빠졌을 것이다. 3년 전쯤 백내장 수술과 더불어 일종의 노년 라식 수술을 통해 새로운 눈을 얻은 뒤, 아버지는 육십여 년 내내 미간을 찌푸리고 봤던 것을 또다시, 또다시 들여다봐야 하는 생활로부터 마침내 해방되었으나 그에게도, 또 내게도 족쇄 같은 안경은 잊을 수 없는 사물이다.
집요하리만치 꼼꼼하고 깔끔해 내 안의 원초적 남성성을 ‘세심함’으로 규정하게 만든 아버지의 귀가 후 첫 번째 루틴은 1분 넘게 손 닦기, 그 다음 안경 닦기였다. 소유한 모든 사물을 새 것처럼 관리하는 데 도가 튼 아버지의 안경에는 흔한 기스 하나 없었고, 이후로 본 모든 안경을 통틀어 가장 두껍고 무거웠던 안경알은 늘 통과된 사물을 한껏 작아 보이게 만드는 동시에 선명하게 비추었다. 여섯 살 무렵이던가, 씻으러 들어간 아버지 몰래 안경을 들어 써본 뒤 곧장 아찔한 현기증에 주춤거렸던 기억. 코앞에 놓인 풍경이 일순간 흐려지며 어른거리는 형체로 탈바꿈하는 장면은 어쩐지 은밀한 중독성이 있어서, 그날 이후로도 나는 몰래 아버지의 안경을 써보곤 했고 마술적인 시야를 선사하는 장난감에 몹시 도취된 나머지 세 살 동생에게도 진귀한 경험을 권하곤 했다.
처음으로 아버지의 눈을 안경 없이 바라본 순간도 선명하다. 안경을 쓴 아버지의 눈은 너무 멀고 작게 보였으나, 지나치게 두껍고 무거운 투명 필터를 제거하면 기이하게 커다란 눈이 드러났다. 과로에 때꾼해진 눈가와 자글자글한 잔주름, 이미 사십대 이전부터 깊게 패인 미간 사이의 선까지 선연해졌다. 경이롭고 아름답기보다는 아득하고 공포스러운 광경.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단편소설 <소피아의 재앙>에는 ‘나’(소피아)가 늘 조롱조로 몰래 괴롭히던 교사의 눈을 처음으로 안경 없이 바라보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소피아 역시 교사의 맨눈을 처음 본 순간 경악한다. 속눈썹이 두터운 두 눈이 그녀를 빤히, 맹목적으로 바라보자, 자신이 능수능란하게, 그리고 몰래 바라보며 통제하고 있다고 여겼던 대상에게 자신 역시 ‘보이는’ 대상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생경한 공포에 사로잡힌 것. 여덟 살 남짓의 소피아는 쓴다. 교사의 눈이 바퀴벌레 같았다고. 그리고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시선으로부터 달음질친다.
아버지의 맨눈을, 안경에 가려져 있던 날것의 눈을 처음 본 순간 이후로 지금껏 무수히 많은 영화에서 마음속 깊은 진심을 이야기하려는 사람들이 안경을 벗는 모습을 마주쳐 왔다. 대상을 지긋이 응시하다 안경을 벗고, 마른세수를 하고, 한숨을 옅게 내쉬고, 다시금 시선을 대상에게 고정한 채, 그들은 숨겨 왔던 진실의 말을 뱉는다. 수차례 반복되는 장면들을 유심히 지켜보며, 내 안에는 풀리지 않는 의문이 남았다. 안경을 벗는 행위가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드러내는 행위를 은유하거나 그것을 예고하는 듯한데, 사실 안경을 벗자마자 진입하게 되는 건 또렷함이 사라진, 불분명하고 흐릿한 덩어리의 세계이므로 그 행위는 어떻게 솔직한 마음의 내비침이 되는가. 여러 번의 마른세수 끝에 나는 그 장면들을 이렇게 해석하기로 했다. 누군가 본심을, 속 얘기를 꺼낼 때는 필사적으로, 상대를 똑바로 보지 않기 위해 안경을 벗는 거라고. 똑바로 보게 되면 곧장 겁에 질릴 테니까.
*
[탁] 5.
[탁] 2.
[탁] 8......? 아닌가, 6인가...... 아니다 9요......
[탁] 안 보여요.
[탁] 안 보여요.
[탁] 그것도...... 안 보여요.
모든 종류의 검사가 그러하듯 시력검사 역시 언제나 옅은 수치감을 동반한다. 저번 검사 때는 보였던 기호가 더는 보이지 않는 경험을 늘 하게 되는데, 아무리 눈을 감았다 떠도 흐릿함은 그대로여서 갖게 되는 순간적인 먹먹함은 어쩔 도리가 없다. 어쩔 줄 모르게 만든다.
고객님은, 음, 사위량이 많으세요. 그게 뭐냐면. 시선이 틀어져 있다는 건데요. 사물을 볼 때 항상 긴장 상태로 있기 때문에 피로감이 빨리 오게 돼요. 또래 분들이나 뭐 일반적인 수준에 비해서도 사위량이 굉장히 많으시네요. 이 현상이 더 심해지면 사물이 두 개로 보이게 될 수도 있어요. 평소에 눈이 뻑뻑하거나 피곤하다는 생각 많이 하실 거예요. 어떻게 하면 되냐면요, 가까운 사물 말고 저 멀리, 저기 저 아파트 뒤쪽 산 있죠, 저런 먼 데에 시선을 고정하고 계시면 돼요. 무조건 멀리, 멀리 보셔야 해요. 그리고......
나이가 아직 젊으신데, 중년안이 있으시네요. 이건 뭐냐면, 말 그대로 눈의 탄력성이 떨어져서 멀리 보고 가까이 보는 것의 차이를 빠르게 감지하고 모드 전환을 못하는 거예요. 초점 전환이 느려지는 거죠. 어르신들이 돋보기 쓰시는 이유랑 비슷한 거라고 보시면 돼요. 그래도...... 음...... 아직은 젊으시니까...... 눈 자체에 근력이 아주 없진 않거든요. 눈을 잘 쉬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멀리 보시고요. 멀리.
틀어진 시선과 긴장한 눈, 먼 것과 가까운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눈.
아버지는 삼십대 후반에 중매로 (간신히) 어머니와 결혼했는데, 이따금 어머니의 시력이 좋아서 결혼했다는 농을 치곤 했다. 실제로 어머니의 속눈썹 많은 눈은 커다랗고 맑을 뿐 아니라 그 힘까지 좋아 오십대를 훌쩍 넘기고도 미간을 찡그리는 대신 동그랗게 뜬 채로도 멀리 있는 표지판을 줄줄 읊을 수 있을 정도였다. 칠십대가 코앞인데 아직도 플러스다. 마이너스 말고 플러스. 눈 좋은 사람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으면 자신의 극심하게 나쁜 시력이 유전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순진한 희망을 아버지는 은밀히 품었을 터다. 그러나 어머니가 발품 팔아 구비한 중고 세계문학전집과 위인전집을 조명 환경과 무관하게 펼쳐드는 바람에 내 눈은 빠르게 나빠졌다.
초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안경을 쓰기 시작한 나는 아버지와 정반대로 안경을 쓰는 족족 부러뜨리거나 휘게 만들어 늘 비뚜룸한 시야를 유지했다. 드림렌즈에 하드렌즈에 소프트렌즈 같은 필터를 거쳐 이제는 비뚜룸한 시야에 틀어진 시야, 거리를 분간하지 못하는 시야까지 찬찬히 얹어지고 있다. 렌즈를 각막 위에 가만 덧대듯이, 그렇게 한 겹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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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만치서 걸어오는 누군가의 실루엣이 두 개이다가 슬그머니 겹쳐지다가 다시 두 개가 되는 순간을 맞이할 때마다 눈을 감는다. 사방이 막혀 있어 멀리 보는 것이 쉽지 않을 때에도 눈을 감는다. 렌즈를 낀 채로, 혹은 안경을 쓴 채로도 알 밑으로 손가락을 넣어 눈두덩이 위에 올리고 눈을 감는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아지랑이처럼 흔들릴 때, 어질어질하며 비틀거리는 시야를 그 자체로 수용하는 법을 나는 아마 천천히 배우게 될 것이다. 시각 대신 다른 감각을 여는 법을 깨우치게 될 것이다. 가령,
비 내리는 날 우산 밑으로 뚝뚝 떨어지는 빗방울의 단속적이면서 동시에 연속적인 소리.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사람들의 말소리. 나는 “방금 저 사람/저거 봤어?” 하는 질문에 한 번도 제대로 답한 적이 없는데, 그것은 내가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얼굴이며 불특정 사물을 유심히 보는 데 관심이 많지 않거니와 무엇도 또렷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말소리를, 목소리를, 어조를, 특정 단어를 발음하는 방식을 귀 기울여 듣는다. 토요일에, 엄마가 먼저, 미친, 내가 진짜, 같이 있었는데, 그랬다니까? 어쩔 수 없지! 어느 틈에 가까워졌다 휙 멀어지는 틈새에서 귓가에 꽂혀드는 말을 귀로 들은 뒤 혼자서 똑같이, 나직하게 발음해보는 것은 나의 비밀스러운 습관 중 하나다. 토요일에, 엄마가 먼저, 미친, 내가 진짜, 같이 있었는데, 그랬다니까? 어쩔 수 없지!
왼쪽 발뒤꿈치에서 튀어 오른쪽 종아리에 닿는 물방울, 저벅거리는 진흙의 감촉, 이 발소리와 저 발소리의 차이(어디에 무심함이 있고 어디에 조심스러움이 있고 어디에 무례가 있는지, 이따금 들을 수 있다), 누군가의 등에서 끼쳐오는 냄새, 벅벅 목덜미며 팔뚝을 긁는 소리, 다시 찰박찰박 발소리들. 귀는 눈처럼 닫을 수도 없으니 어쩌면 우리의 눈보다도 귀가 더 피로할 텐데,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을 쓸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 없고 앞으로도 안 할 것이다. 점점 채도며 해상도며 픽셀이며 높아지기만 하는 세상에서 고도로 정밀한 시야를 매 순간 추구하는 일은 징그럽지 않은가. 어차피 볼 수 없는 것이 남아 있으므로. 차단하고 싶은 소리를 전부 차단하는 일이 불가능하듯이.
그래서 제대로 보이냐?
이것이 저 질문에 대한 나의 어지러운 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