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의 여름
낮에 본 흰구름은 소프트 아이스크림처럼 뭉게뭉게 피어올라 있었다. 하늘은 말갛게 연한 색이었고 골목에서 담배를 피던 친구의 등 뒤로 선 짙푸른 나무들은 ‘여름이었다’는 말을 떠올리기에 충분히 건강해보였다. 기온 삼십 도에 가까운 무더운 공기를 킁킁대면서 즐거워했다. 그러나 “곧 장마겠군.” 하고 읊조리는 친구의 의미심장한 목소리에 하얀 구름과 맑은 하늘은 먹구름과 우중충한 회색빛으로 바뀌어버렸다. 그렇지, 장마철에만 보이는 구름이 바로 저런 거였지, 생각하면서도 흰구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좋은 것의 뒷면에는 언제나 나쁜 것이 붙어 있으니까. 그리고 그 나쁜 것도 사실 조금 더 생각해보면 완벽한 불행인 것만은 아니니까.
여름은 참 신기한 계절이다. 샤워로 보송해진 몸과 마음으로 사뿐히 길 위로 나섰다가 습한 공기와 땀으로 다시 찐득해지는 찝찝함, 그렇게 낮동안 내도록 쏘다니다 해가 지고 늦은 밤이 찾아오면 마치 축제의 2부가 시작되는 것처럼 색다른 활기가 공존하는 날들이 계속된다. 그러다 장마가 찾아오면 해가 뜨는지, 떴는지, 졌는지도 모르는 일관된 톤으로 하루가 채워진다. 여름을 배경으로 하는 애니메이션이나 시와 소설이 만들어내는 청량함은 실제 한국의 여름과 너무나 동떨어진 감각이기에, 우리가 사랑해 마지않는 그러한 여름의 기후는 여름의 이데아라고도 할 수 있겠다. 현실에서 마주할 수는 없지만 분명 사람의 마음과 인지 속에서 이상적으로 자리 잡은 실체 아닌 실체. 그러니 한국의 살인적인 여름 날씨를 겪으면서도 ‘여름’을 사랑하는 이들은 마음속에 늘 이상을 품고 사는 낭만의 힘을 아는 자들이라 할 수 있을 테다.
나 역시도 물론 ‘여름이었다’의 한 마디가 압도하는 순정함의 힘을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내게 여름은 십대들의 순수한 첫사랑이나 맥주 캔 표면에 어린 차가운 이슬방울보다, 바다와 해수욕장의 이미지가 주는 감각으로 대표된다. 마음속에 품고 있던 이상이 구체적인 현실의 실감으로, 뜨거운 모래와 철썩거리며 일렁이는 파도, 투명한 물속에서 흔들리는 해초들로 나타난 계절이기 때문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온전한 두 다리로 서서 끝없는 수평선을 바라봤던 계절, 2017년 6월의 여름이었다.
부산 광안리 해수욕장이었다. 그때도 흰 구름은 오늘 내가 골목에서 보았던 모양처럼 뭉게뭉게 피어올라 있었고, 아직 방학이 아닌 비성수기의 평일 낮의 바다는 여유롭게 한산했다. 나란히 늘어선 파스텔톤의 파라솔들은 컴퓨터 배경화면의 사진처럼 단정했고, 바다 멀리서 천천히 움직이는 하얀 요트들, 단체로 (아마도 훈련인 듯한) 수영을 하는 남자들의 풍경은 낯설었지만 금세 마음을 뻐근하게 가득 채워버렸다. 운동화와 양말을 벗어두고 해변의 사선을 따라 바닷물 가까이로 조금씩 나아갔다. 내내 앞과 위를 향해있던 고개가 아래로 숙여졌다. 꽤 오랫동안 아래를 바라보았다. 바다에 절반쯤 잠긴 종아리와 물속으로 훤히 다 보이는 두 발, 열 개의 발가락을 한참동안 쳐다보았다. 바지 뒷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동영상을 찍었다. 맥주 거품처럼 포말을 일으키며 무릎 아래에서 부서지는 파도와 발가락을 일 분쯤 찍었다. 고개를 들어 다시 앞을 보았다. 오른쪽에서 움직이던 요트들은 어느 새 나를 지나쳐 왼편으로 가 있었고 수영하던 남자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해변에도 없었다. 눈물이 났다. 내가 보고 있는 이 장면을 나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더욱 믿을 수 없던 것은 이 뜨거운 풍경 속에 내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의심이 불가능한 단단한 현실이었다.
물 밖으로 걸어 나오니 한 시간 반이 지나 있었다. 뙤약볕이 내리쬐고 있었지만 피부가 타는 줄도 땀이 흐르는 줄도 몰랐다. (집에 돌아와 다음 날 거울을 보고 한참 웃었다.) 파라솔 아래에 앉아 바다와 해변, 나선으로 굽어지는 모래사장의 끝 그리고 그 너머를 보다가 다시 천천히 되감기하듯 시선을 거두어 바다와 하늘의 평면 속으로 던지고, 그와 마주선 호텔과 식당들이 만드는 스카이라인을 봤다. 사물과 풍경을 보는 행위는 시선의 주체와 대상의 역학을 자연스럽게 만들어내지만 이 경우에는 그 위치가 역전되어 있었다. 분명 앞을 바라본 것은 나의 두 눈이었지만 어느 정도의 속도로 지나가는지 알 수 없는 그 시간동안 나는 그것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고 느꼈다. 아니, 느낌이 아니라 정말 그랬다. 말없이 풍경을 계속 바라본 것은 그것들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그 안에 내가 포함되어 있다는 실감을 계속해서 확인받고 싶어서였기 때문이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이 허구가 아니라 현실의 실체라고 바다와 하늘과 요트와 모래는 끊임없이 일러주었다. 그들의 시선에 포획된 것은 다름 아닌 나였다.
그날, 태어나서 바다를 처음 본 것은 아니지만 그 바다는 내가 살면서 처음으로 경험한 것이었다. 아무런 문제가 없는 두 다리로, 내 다리로, 맨발로 모래사장을 걷고 물속에 들어간 건 처음이었으니까. 서거나 본다는 건 참으로 보잘 것 없는 행위이기도 하다. 하지만 동시에 아주 특별하고 희소한 행위이기도 하다. 내가 두 눈이 없거나 한 쪽 눈만을 가지고 태어났을 수도 있고, 비록 정상인 두 눈을 무사히 가지고 태어났다 하더라도 어떤 불의의 사고를 거쳐 손상되었을 수도 있다. 오히려 내겐 보고 걸을 수 있는 신체 기관이 멀쩡하게 유지되는 것이 더욱 비현실적인 실감으로 다가온다. 그 어떤 것도 당연하게 주어지는 것은 없다. 정상 범위로 기능할 수 있는 신체를 가지고 오늘을 살아간다는 것은 기이한 확률로 복권에 당첨된 일과 마찬가지다. 당첨자의 수가 많다고 해서 당첨이 절대적으로 당연한 것은 아니다.
일전에 비 오는 날 약속을 취소하고 오랜 친구를 영영 잃어버린 이야기를 쓴 적이 있다. 그때도 잠깐 언급했지만 내가 지금처럼 두 다리로 멀쩡하고 자연스럽게 걸어 다니게 된 건 10년도 채 되지 않았다. 2017년부터이니 만 6년하고도 조금 더 지난 셈이다. 그 이전의 나를 상세히 묘사하고 싶지는 않은데, 왜냐하면 이제는 정말로 그 시절이 점점 흐릿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다수의 사람들이 영위하는 일상적인 직립 보행을 하지 못했다고 요약하면 되려나. 에세이는 자기 이야기를 풀어놓는 최적의 장르이지만 나는 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어렵다. 어쩌면 수술과 재활 후 지금처럼 지낼 수 있게 된 후로는 과거의 시절을 그저 ‘과거’로 뭉뚱그려 던져두고 그 시절의 나를 더는 소환하고 싶지 않아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기억도 흐려지는 거겠지. 물론, 지금의 나는 그 시절의 내 모습을 토대로 만들어진 것이다. 의사결정 과정이나 문제에 대처하는 자세 등등. 하지만 그 시절의 내가 어떤 모습으로 아팠고, 통증이나 고통의 강도와 양상에 대해 구구절절 기술하는 것은 글쎄, 아직까지는 그것에 대한 필요성을 잘 모르겠다는 입장이다.
나는 해방촌에 산다. 우리 동네는 길이 구불구불하고, 좁고, 경사가 급한 곳이 많아서 그런 곳들을 오르내리면서 종종 이런 생각은 한다. 이렇게 열심히 다니려고 나았나보다, 뭐 그런 것들. 그조차도 때로는 아팠던 사람의 감상주의 같은 것이 아닐까 싶어서 이내 피식 웃고 말지만. 그래도 아직은 전시회를 다니는 게 많이 힘들고 특히 비 오는 날은 물론 조심해야 하고, 특수 깔창 없이는 신발을 신을 수 없다던가 하는 자잘한 사항들은 있지만 그래도, 두 다리로 걸어 다니고 카페도 가고 학교도 가고 산책도 할 수 있는 건 너무나 특권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의 삶이 그냥 주어진 게 아니라 나에게는 획득한 것이라는 의미가 있기에 다리를 포함한 신체에 대한 사유는 언제나 너무 어려운 일이다. 복합적이고, 이중적이고 그러면서도 또 모순적인 사안. 장애를 경험한 사람이지만 현재의 나는 비장애인으로 살아가는 것도 그렇다. 장애가 과거의 ‘경험’으로 정리될 수 있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문제뿐만 아니라 나의 이러한 특수한 경험이 그저 개인적인 역사의 사적인 단면으로만 남아도 되는 걸까? 하는 고민, 나와 같은 사람이 분명히 세상에 존재할 텐데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다는 생각…… 여러 가지 복잡한 심경이 있다. (의학기술이 십 년 전보다 엄청나게 발전해서 그리고 인터넷의 힘에 힘입어 요즘은 이 질환에 대한 환우 모임도 생겼다고 한다.)
어쨌든, 그 여름 광안리 바다에 발을 담그고 서 있던 뙤약볕 아래의 시간은 그래서 ‘지금’ 내 모습으로 살게 된 시작점처럼 느껴진다. 그날 바다에서 이제는 여태의 시간을 모두 뒤로 할 때라고, 처음을 선언해야 할 때라고 다짐했다. 그날 이후로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성격이 가장 많이 바뀐 것 같다. 나의 시간은 세상의 시계로 측정될 수 없으니 세상의 속도에 나를 맞추는 게 아니라 그저 나는 나의 속도를 만들어가야 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온갖 연습지와 이면지를 구겨던지고 새로 막 뽑아져 나온 구김하나 없는 깨끗하고 정갈한 백지를 두 손에 받아 든 느낌. 그때부터 나는 다른 사람들과 나를 비교하기를 멈췄다. ‘타인과 비교하지 말 것’과 같은 무슨 자기계발서의 담론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도 그럴 것이, 비교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안 아프고 두 발로 그냥 걸어다니게 될 수 있는 시점이 아이가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시점이라면 나는 그때 겨우 다시 한 아이가 되었을 뿐이니까. (이건 비유가 아니다. 실제로 내 허벅지 뼈의 나이는 많이 어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