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하면 무엇이겠는가, 그렇다. 소풍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의 연령을 짐작할 순 없겠으나 아마 봄소풍을 잊고 살아온 지 이미 여러 해가 된 이들이 많을 것으로 생각한다. 부산보다도 습해진 서울의 오월의 하순에 쓰이고 있는 이 글은 이제 봄에게 안녕을 고하는 작별인사쯤 되겠다. 그러나 계절의 끝자락만큼 그 시절을 오롯이 돌아볼 수 있는 시점이 있을까? 그러니 낮의 뜨거운 습기와 밤의 차가운 건조함이 하루 동안 공존하는 여름의 초입에서, 가장 봄다운 무엇에 대해 떠올려 본다. 그리고 내게 그것은 바로 소풍이다. 소풍은 다른 말로 놀이다. 노는 시간이다. 어릴 때처럼 노란 배낭에 (김밥x1, 음료수x1, 과자x2)를 장착하고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던 그런 소풍은 더는 아니게 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나름대로 나만의 소풍이 있다. 오늘은 소풍이라는 단어를 빙자하여 놀이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다시 조금 묵직한 질문이다. 논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분법적으로 접근하려는 것이지만 적어도 나의 현실에서 논다는 것은 일의 감각이 배제된 상태로 ‘오늘’을 그저 만끽하는 것이다. 이 정의에 따르면 때로 일하는 것 또한 놀이의 일종이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니까 ‘나’의 자아를 저 멀리 어딘가로 보내두고 대상과 사건 안으로 몰입하여 들어가 뛰노는 일이다. 이제는 인정한다. 워커홀릭인 나에게 논다는 것은 두 가지 경우다. 일과 완전히 유리된 일상을 보내거나 혹은 일 속에서 놀거나.
첫 번째 경우부터 생각해 보자. 어떻게 하면 자아를 유배지로 보낼 수 있을까?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하고 싶었지만 못한 일들을 하면 된다. 최근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풍’은 예술의 전당 시계탑 근처 잔디밭에서 대(大)자로 두 팔 벌리고 드러누워 하늘을 보는 일이다. 아직 한 번도 해보지 못한 분들이 계시다면 꼭 해보시길. (밤에는 주의해야 한다. 밤이슬에 책과 엉덩이가 젖기 일쑤다.) 그렇게 자유로울 수 없다. 서울 강남의 한복판에서 한 인간이 최대치로 자유를 감각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자부한다. 요즘 같은 날씨에는 선글라스 필수 지참이며, 좋은 어쿠스틱 앨범을 틀어두고 이어폰을 귀에 꽂으면 더더욱 환상적이다. 도시의 세속적인 열기에 찌든 인간은 보통 산으로 가거나 (위로 오르기) 바다로 가는데 (가장자리로 도망치기) 서울 내에서는 그러기가 쉽지 않으니 잔디 위로 드러눕는 (아래로 꺼지기) 것이다. 3월부터 5월동안 하도 많이 누워서 결국 방수가 되는 (밤이슬 방지) 돗자리를 하나 구입했다. 하루 종일 직사각형의 선분에 의해 구획된 공간에서 읽을 때와 선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오로지 펼쳐진 면들만으로 이루어진 탁 트인 곳에서의 읽기는 차원이 다르다. 같은 책도, 같은 문장도 완전히 다르게 스며든다.
또 다른 방법은 핸드폰을 가방 안에서 꺼내지 않고 하염없이 걷는 것이다. 이건 강북에서 할 수 있다. 시청역에서 출발해 덕수궁 돌담길을 끼고 돌아 광화문까지 지난다. 좌측의 서촌으로 빠지거나 우측의 안국으로 빠진 후 또 하염없이 걷는다. 궁궐 담벼락과 그 위에 걸린 구름들을 그저 쳐다본다. 4월이면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하는 색색의 연등이 즐겁게 걸려 있을 테고, 5월이면 안국역 근처 마당에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하는 버스킹과 마술 공연들을 볼 수 있다. 삼청동을 지날 때면 팥빵도 하나쯤 사먹는다. 한복을 입고 궁을 쏘다니는 젊은 남녀들을 보면서 부러워할 때쯤엔 좋아하는 에스프레소 바에 들러 콘파냐 한 잔을 먹는다. 해가 저물녘쯤 되면 청와대 마당 벤치에 앉아 대충 가방에서 아무 책이나 꺼내 읽는다. 킥보드 타는 꼬맹이들이 꺅꺅 거리는 소리가 즐거운 배경음악이 된다. 그러다 저녁이 오고 배가 출출해지면 노무현 대통령이 참모들과 즐겨 찾았다던 삼계탕 집에 가서 한 그릇을 한다. (인삼주 투하는 필수다.) 뜨끈하게 한 그릇 비우고 나면 불러 터질 것 같은 배를 부여잡고 교보문고로 간다. 잡지 코너를 슥, 둘러보고 요즘 베스트셀러들에는 뭐가 있나 체크한다. (대개 별 것 없군, 하고 스치게 된다.) 대충 보고 싶은 코너를 돌고 괜히 핫트랙스 코너에 가서 전자기기들 신제품이 업데이트 된 게 있나 확인도 하고 나면 다시 광화문으로 올라온다. 초저녁의 세종대로의 야경이 뿜어내는 불빛은 언제나 다정하고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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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소풍?
어떤가? 별로인가? 그렇다면 당신은 파티 피플이거나 나보다 더한 워커홀릭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일 속에서 노는 법을 한번 찾아보자. 질문은 이렇게 바뀐다. 우리는 언제 일이 하고 싶어지는가? 답이 없는 질문이라면 이렇게 던져보자. 우리는 어떤 일을 하고 싶은가? 사람은 자신이 잘하는 일을 더더욱 잘하고 있다고 느낄 때 신이 난다. 그렇다면 여기서도 방법은 두 가지다. 내가 잘 하는 일을 ‘일’로 고르거나, 아니면 이 일을 하는 데에 가장 필요한 자질이 나의 특기가 되도록 능력을 계발하는 방법이다.
첫 번째 경우에 주의해야 할 점은 초심이 가능한 오래 유지되도록 하기, 그리고 초심이 처음 그 단계에 머무르지 않도록 초심 또한 성장시켜 나가는 일이다. 아마 의아할 수도 있을 테다. 초심을 ‘유지’하는 게 아니라 ‘성장’시키라고? 그렇다. 일을 시작할 때 그 처음의 ‘나’와 지금의 ‘나’는 결코 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일을 하다보면 처음엔 상상하지 못했던 난관들이 닥쳐온다. 미리 예상하고 미연에 잘 해결한다면 참으로 좋겠지만 태어나서 처음 겪어보는 선택의 순간들은 당혹스럽기 마련이고 문제를 성공적으로 다룰 확률보다 우왕좌왕 하거나 여기 저기 치고 박으면서 사고 칠 가능성이 훨씬 높다. 그러면 그때가 또 하나의 새로운 ‘처음’이 된다. 그때 온몸으로 겪어낸 상황과 얻어낸 최초의 깨달음들이 모여 계속해서 새로운 ‘나’를 만든다. 그 감각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실수는 한 번으로 족하다. 반복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에 그때의 ‘처음’을 잊으면 안되는 것이다. ‘내’가 성장하는 만큼 ‘초심’도 성장한다. 그렇다면 이 두 번째 ‘놀이’는 휴식보다 차라리 (끝나지 않는) 게임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레벨업을 하기 위해서는 던전을 돌고 때로는 지루한 몬스터 잡기를 멈추지 않고 NPC들이 제시하는 여러가지 미션에 성공해야 한다. 레벨이 52쯤 될 때의 ‘나’와 레벨 1에서 나무방망이 하나만 들고 작은 몬스터들에게 덤비던 ‘나’는 완전히 다를 것이다. 그렇게 초심도 함께 성장한다. 내가 일을 놀이로 감각할 때는 이럴 때다. 지나온 어제를 오늘 속에 틈입시켜 바라볼 때.
어쩌면 여기까지 읽은 독자들은 ‘아니 도대체 이게 뭔 헛소리야...’라고 느낄 수도 있겠다. 그렇다. 헛소리일 수 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나라는 인간이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을. 소풍이든 놀이든 정해진 규격은 없다. 내가 즐겁고 가벼워지면 그것이 노는 날이지 아무리 좋은 곳으로 해외여행을 가고 비싼 호텔에 묵고 클럽엘 가고 바(bar)에 간들 내 마음이 답답하다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소풍은 어쩌면 일탈과 동의어인 듯도 하다. 해보지 않던 일을 냅다 내질러 보는 일 (“오늘만큼은! 소풍가는 날이니까!”) 또는 쉬어보지 않은 방식으로 쉬어보는 일. 겨울의 소풍이라면 모르겠으나 봄에 갈 수 있는 ‘소풍’이라면 모름지기 이런 생동하는 흐름 속에 ‘나’를 밀어놓고 자아를 잃어버리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하루 중 너무 많은 시간을 ‘나’를 골몰하며 산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사람들이 내게 무슨 말을 했는지, 사람들이 내게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등등. (물론 그러한 고려가 십분 필요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런 것들을 마음에도, 생산력에도 별 도움이 안 된다.) 오늘만큼은 다 버리고 ‘봄소풍’을 한 번 떠나보길, 영화관에 간지 오래되었다면 티켓박스로 가시고, 산책한지 오래 되었다면 한강으로 무작정 가벼이 걸음을 옮겨 보시길, 바람을 느낀 것이 한참 전이라면 따릉이를 타고 고수부지를 쌩쌩 달려보시길. 그리하여 반복되는 갇힌 날들 속의 ‘나’를 구해내어 주시길. (물론, 나처럼 문학하는 사람은 서점과 도서관으로부터 등 돌리고 친구들에게 전화를 거는 일이 가장 설레고 즐거운 ‘소풍’이 될 테다.)
돗자리를 들고, 잔디밭으로 간다.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