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내가 가장 좋아하던 수돗가. 사진은 농막의 수돗가로 기억 속의 장소는 아니다.
시골집의 수돗가들은 물에 젖은 슬리퍼와 ‘다라이’(대야), 비누, 수세미와 함께
주로 장독대 옆에 설치되어 있다.
우리 집안에는 문학이나 글과 연이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단, 외할머니를 제외하고 말이다. 평생 수박과 단감, 복숭아 등을 일구며 살아온 할머니는 장담컨대 우리 가족 중에서 가장 글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내가 태어나서 내 돈으로 샀던 첫 책은 다섯 살 때 동네 문고에서 외할머니와 함께 가서 구입한 나폴레옹 위인전이었다. (나는 위인전을 좋아했는데 서로 다른 인간들이 겪은 삶의 경험들이 너무나 다채롭고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그들의 위대함보다 특이함을 좋아했다.) 처음으로 받은 용돈을 들고 문방구도 오락실도 아닌 서점에 가겠다고 한 나를 할머니는 그저 데려다 줬을 뿐이다. 서가에서 책을 빼 계산대 앞에 서자 책방 아저씨와 할머니가 신기해하며 나를 기특해 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할머니는 내가 글을 깨치기 전까지 밤마다 책을 읽어주었고 방학 때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일기장을 꼭 챙겨 와 원두막에서도 일기를 쓰는 나를 보며 즐거워했다. 아홉살 때였나, 할머니가 보이지 않아 방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가 작은 방에 있는 할머니를 발견했다. 앉은뱅이 책상 앞에서 허리를 굽히고 앉아 환한 스탠드 불빛 아래에서 모나미 볼펜으로 두꺼운 대학노트에 무언가를 빼곡히 쓰고 있는 모습을 봤다. 아마도 성경 필사와 할머니의 일기였던 것 같다. 언제부터인가 할머니는 내 일기장을 부러 보지 않았으므로 나도 굳이 할머니 공책을 넘겨보려 하지 않았다. 할머니가 보여준 몇 장만 제외하고 말이다. 그때부터 두꺼운 줄노트와 모나미 볼펜의 조합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문구류가 되었다.
몇 해 전부터 할머니는 시력을 크게 잃어가고 있다. 할머니의 눈동자는 나를 바라볼 때 정면이 아니라 옆을 향한다. 그래야 정면이 보인다고 한다. 밭일 외에는 읽고 쓰는 일에 모든 것을 전념하며 그 시간을 사랑했던 할머니에게 흐려지는 시력은 고관절 수술보다도 더 가혹한 것으로 느껴지는 것 같다. 내가 사준 노트북을 더는 못 쓰게 되고, 삼촌이 사준 아이패드는 이제 오디오북으로만 사용할 수 있다. 동네 교인들이 모인 단톡방에서 알림 메시지가 울려도 메시지를 확인하지 못하고 걸려오는 전화도 받은 후에야 목소리로 상대방이 누군지 알 수 있다. 오랜만에 만난 할머니는 집 여기저기를 자잘하게 치우며 던지는 엄마의 잔소리를 들은 척도 안하고 나랑 소파에 누워 신세 한탄을 했다.
일 년에 기껏해야 두어 번 만날까 말까 하는 손자에게 털어놓는 한풀이가 뭐 얼마나 되겠냐마는 (엄마가 일 년 내내 그 모두를 수신하고 있다.) 조손은 친구라고, (물론 이것도 우리 할머니 말이지만) 할머니와의 대화는 언제나 특별하다. 길게 말하지 않아도 깊이 공감 받는다고 해야 할까. 엄마와 아빠에게 말할 엄두가 나지 않는 것들, 고민과 질문을 할머니 앞에서는 쉽게 꺼내놓을 수 있다. 할머니가 내어주는 답변은 신기하게도 언제나 정답이다. 그렇게 떠나보낸 많은 고민들이 과거 속에 잠들어 있다. 모든 노인이 현명한 것은 아니겠으나 노인의 현명함은 젊음의 영특함을 단번에 부끄러움으로 만든다. 나는 그렇게 부끄러워질 때 못내 기쁘다. 그 기쁨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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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는 귀다. 오른쪽 귀는 다가가서 크게 소리를 지르면 간혹 몇 마디를 주고 받을 수도 있지만 대개는 안 들리기 때문에 바로 옆까지 다가가도 등을 돌리고 앉아 잡초를 뽑거나 뭔가를 다듬고 있을 때에는 누가 온 줄도 모른다. 할아버지가 청력을 잃기 시작한 후로 우리는 만나도 거의 대화를 할 수 없었다. 대신, 표정을 읽는다. 농막에 들어서서 “할아버지!”하고 크게 외쳤을 때 할아버지는 다섯살 어린 아이가 놀이공원에서 우연히 친구를 만난 것처럼 양손을 뻗어 날 향해 크게 흔드셨다. (우리 사이의 거리는 1미터 남짓이었다.) 내가 어릴 때에도 할아버지가 크게 말씀이 많으셨던 건 아니다. 엄마와 외삼촌, 할머니가 큰 소리로 집이 떠나가라 떠들면 할아버지는 하늘색 날개가 달린 선풍기 옆에 기대어 앉아 수다스러운 가족들과 텔레비전을 번갈아 보시다가 먼저 조용히 침실로 들어가시곤 했다. 할아버지가 일어난 자리에 늘 놓여있던 ‘꿀수박’ 부채를 생각한다. 그날도 그랬다. 할아버지는 내가 소파에 할머니와 누워있는 것을 보고 뒷문으로 조용히 나가 작은 쟁기를 들고 파밭으로 갔다. 꽤 시간이 지나도 할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아 슬리퍼를 신고 밖을 내다 봤더니 저 멀리 복숭아 나무 근처에서 뭔가를 하고 계셨다. 등을 돌리고 있는 백발의 할아버지를 몰래 핸드폰으로 찍었다.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 있다. 몇 해라고 적기에는 그보다 조금 더 오래전에 할아버지와 오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어느 날 가을의 저녁에 할아버지는 내 옆으로 부러 오시더니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하시겠다는 태도로 입을 열었다. 먼저 꺼낸 건 전쟁 이야기였다. (할아버지는 육군에서 사병을 훈련시키는 교관이었다.) 육이오가 났을 때 낙동강이 정말로 피바다였다고 말 그대로 피바다였고 축 늘어진 사람들의 몸이 여기저기 널려 있고 흘러 내려오고 있었다고. 그러다 이야기는 문득 농사에 관한 주제로 흘러갔다. 할아버지는 내가 아는 최고의 농부다. 특히 복숭아에 한해는 더더욱 그렇다. 요즘에는 농촌에 젊은 사람들이 없어서 비법을 전수할 수가 없다고 아쉬워하면서 (엄마나 삼촌들 중 누구도 농사를 짓지 않으니) 나에게 차근차근 비법을 하나씩 설명해주셨다. (내가 농부가 되기로 마음 먹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마는…) 설명이 쉬우면서도 매우 논리적이어서 농사에는 일자무식인 나도 쉽게 이해가 갔다.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굉장히 의외의 재배법이었다. 언뜻 들었을 때 그렇게 하면 농사를 죄다 망칠 것 같은 방식이었는데… 그렇게 해야 복숭아가 벌레없이 최고로 달콤해진다고.
나는 전쟁 이야기가 나올 때부터 핸드폰으로 몰래 음성 녹음을 시작했다. 그때의 대화가 녹음이 되었다는 것은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엄마도 그 누구도 모를 것이다. (처가에 오면 늘 자는 아빠는 더더욱 모를 것이고.) 이야기를 하다 문득 할아버지는 눈물을 뚝, 뚝 흘렸다. (나와 할아버지만 아는 눈물이다.) 나는 애써 울지 않으려 기를 썼다. 그때 할아버지도 나도 직감했던 것 같다. 어쩌면 이 길고 긴 다정한 대화가 우리의 마지막 ‘대화’가 되리라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나는 녹음 버튼을 누를 수밖에 없었다. 매년 할아버지 할머니를 뵈러 갈 때마다 나는 어쩌면 그분들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순간들을 최대한 많이 저장해두려 남몰래 애를 쓴다. 훗날 다시 꺼내 들을 용기가 생길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그렇게라도 마지막을 꽉 붙잡아두고 싶은 것일 테다. 이번에 할아버지와 나눈 대화는 “할아버지 저 왔어요!”와 “벌써 가나?” 단 두 마디뿐이었다. 엄마가 차를 돌리고 할아버지 할머니가 시야에서 더는 보이지 않을 때까지 창밖으로 손을 내어 힘차게 흔드는 것이 다만 나의 대답이었다. 사랑한다고, 많이 사랑한다고, 그러니 조금이라도 더 계속 건강해주시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