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가 좋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사람은 나처럼 계절을 미리 감각하는 종류의 인간이다. “다행히 여름이었다”고 말하는 그 설익은 가을 한 가운데서 그러나 어쩐지 미리 “가슴에 영근 것이 있어”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는 사람은 여름의 땀방울 너머로 익어가는 가을을 미리 보는 사람이다. 한편으로 이 사람은 지난 계절도 조금 더 오래 산다. 계절을 미리 감각하는 사람이라면 얼른 지난 계절을 떠나보내고 싶어 하지 않을까, 하고 추측해보기도 하지만 그런 것만도 아닌 듯하다. 개에게 가죽은 사계절용이니 땀이 흐르는 건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닐 텐데도 ‘나’는 개가 더운 여름에 가죽을 벗지 않는다고 걱정한다. 그건 아마 ‘나’가 자신에 대해 느끼는 마음의 투사일 테다. 이제는 입기에 더워진 지난 계절의 옷을 벗고 가벼워져야 할 터인데, 아직도 기온에 비해 두꺼운 옷을 입고 있다.
이 시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은 개와 ‘나’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시선의 느린 교차다. 처음 만나는 개와 ‘나’가 서로를 스치고, 훑는다. 태어나서 처음 조우하는 두 존재는 서로 바라보면서 익어간다. 이때 ‘익는’ 상태 변화는 낯선 사이에서 서로를 아는 존재로 변해가는 일인데, 이것이 마치 계절이 무르 익어가는 ‘익는’ 변화와 연결된다. 시 속에서 ‘나’와 함께 하고 있는 개를 ‘너’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익어가는 계절 속에서 너와 나는 함께 익어간다. (“낯이 익고 있다/냄새가 익고 있다”) 네가 가죽을 벗지 않고 있는 것처럼 나도 땀이 흐르는 데도 외투를 벗지 않는다. 너의 “어쩔 수 없는 일”이 나에게로 와서 “어찌하지 않은 일”이 된다. 마음을 먹는다면 나는 외투를 벗고 땀을 흘리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네가 가죽을 벗지 못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나도 부러 외투를 벗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아직 껍질 안에 있다”. 익어가는 가을을 마주하는 한여름의 껍질 안에 함께 있다. 너의 가죽과 나의 외투 안에서 말이다.
왜 외투를 벗지 않느냐고 마치 누군가가 물어본 듯, “미련이 많은 사람은/어떤 계절을/남보다 조금 더 오래 산다”고 말하는 ‘나’의 목소리는 스스로를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목소리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할 수 있는 사람은 ‘나’의 감정을 ‘너’와 ‘그/그녀’의 위치로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이다. 자기 연민이 마음을 갉아먹게 내버려두는 사람이 아니라 그를 통해 ‘너’와 조우하고 함께 익어가기를 택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이 시가 참 좋다. 그리고 그 함께함에는 비약적인 낭만이나 섣부른 낙관이 없다. 오히려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상실의 감각이 자리한다. (“바람이 불어왔다가 물러갔다/뭔가가 사라진 것 같아/주머니를 더듬었다”)
주머니를 더듬어서 손 안에 쥔 건 꼬깃한 영수증. 아마도 오늘의 계절인 여름은 ‘나’를 압도적으로 장악하는 게 아니라 여기저기 귀퉁이가 접힌 몰골로 주머니 안에 들어 있다. ‘나’의 계절감은 언제든 그럴 테다. 계절을 한 칸 당겨서 살아가는 자들의 계절감은 다가올 계절과 지난 계절들 속에서만 만들어진다. 그렇기에 “어떤 계절을/남보다 조금 더 오래 [살고]” 왔다고 말하기에는 아직 설익은 계절을 “가슴에 [영글]”고 산다. 한 치 앞을 미리 보는 사람은 사실상 어제와 내일을 품은 오늘을 누구보다 생생하게 살아내는 사람이다.
그러니 그는 언제나 “기다리는 자”로서 삶을 살아간다. 그러니 무언가를 잃어버려도 그 상실에 쉽게 낙담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지나간 것들과 도래한 것들을 엮어 땀이 흐르는 오늘로 생생하게 감각할 수 있다. K가 나에게 계절을 미리 사는 사람 같다고 말해주었을 때 내가 기뻤던 것은 그 말이 「계절감」의 화자와 닮았다는 말로 들렸기 때문이다. 시를 말하고 있는 ‘나’는 이게 다 미련 때문이지요, 하고 부끄러운 듯 담담하게 쓰고 있지만 그게 지난날을 잊지 못하고 보내지 못하는 집착 어린 마음이 아니라는 걸 안다. 오히려 보내었으므로 과거를 상실로 감각하고 어디선가 나타나는 한 마리 개와 함께 ‘너’와 ‘우리’를 느끼는 거니까.
이 시를 처음 읽은 건 2017년 8월 3일 오후 다섯시 십육분. 오래 전 나는 내가 좋아하는 글귀와 시편들을 노트에 손으로 써서 모아두었고 포스트잇에 감상을 적어 귀퉁이에 붙여두곤 했다. (그 시절이 그립다.) 기록에 의하면, 그때의 나는 이 시에서 ‘나’와 ‘개’가 바라보는 장면을 두고 ‘접촉 후 온도가 상승하는 장면’이라 읽었다. 그래서 땀이 나는 것이라고. 그리고 둘은 무언가를 견디고 있는데 그 견딤의 땀방울이 가을의 열매를 미리 영글게 한 것이라고도 적었다. 가을이 미리 온다는 일은 다르게 말하면 여름을 채 만끽하지 못했다는 뜻일까 의문하기도 한다. ‘미련’이라는 단어를 읊조리며 시를 끝내고 나서 화자는 어쩌면 개의 젖은 머리칼을 쓸어주었을 지도 모르겠다고도, 그리고 이 ‘미련’은 다만 화자의 겸손한 마음에서 나온 거라고 적혀있다. 자기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자가 그 감정들을 위풍당당하게 꺼내어 두는 게 아니라 다만 한 줌의 미련일 뿐이라고, 겸손하게 조심스럽게 영수증처럼 접어 슬쩍 꺼내 보인 시라고. 정말 그런 것 같다. ‘나’의 목소리는 자신을 누구보다 잘 알지만 또 한편으로는 가장 잘 모르는 사람임을 아는 사람의 목소리다. 「계절감」은 계절을 겸손하게 만끽하고 있는 사람의 시다.
인왕산과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벚나무들은 이미 만개했는데 우리 동네 남산은 아직 무채색이다. 봄은 이미 왔지만 한편으로는 아직이다. 낮의 바람은 덥고 밤의 바람은 시리다. 계절을 당겨 사는 이의 몸에는 사계절이 모두 들어있다. 그렇기에 저 시의 제목이 ‘여름’이 아니라 ‘계절감’이겠지. 우리는 무언가를 늘 잃어버리고 보내며, 그리고 다가올 것들을 기다리며 산다. 그게 바로 오늘의 감각이다. 아직 껍질 안에 있다는 감각, 채 완성되지 못했다는 감각으로 하루하루를 불완전하게 만들어 나가면서 산다. 우리의 완전함은 그러니 매순간의 불완전함으로 이루어질 테다. 그러니까 어제도 오늘 속에 있고, 내일도 오늘 안에 있는 거겠지. 이게 바로 겸손하게 계절을 만끽하는 사람의 태도인 것 같다. ‘겸손’과 ‘만끽’이라는 단어가 어찌 보면 조금 역설적이기도 한데, 불가능한 모순은 아닌 듯하다. 나도 ‘나’처럼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현재에 최대한 충실하되 그 현재에는 내가 떠나보낸 시간과 다가올 미지의 순간들이 함께 공존하고 있음을 언제나 잊지 않고 사는 사람이고 싶다. 봄 앞에서 겸손해 지는 것은 아직 피지 않은 꽃의 색을 미리 보고, 지난겨울의 앙상한 추위를 동시에 떠올리는 일, 그리고 어쩌면 그게 가장 봄인 순간이 아닐지.
다음 주에는 분명 남산이 조금 푸릇푸릇해질 것 같다. 마당 앞 개나리 나무의 초록이 꽤 무성해졌기 때문이다. 한 치 앞만 잘 본다.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