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가 모 씨의 휴식
전승민
만나는 사람들마다 “쉴 때 어떻게 쉬세요?”를 안부처럼 물어보고 다니던 때가 있었다. 어떻게 쉬어야 잘 쉬는 것인지 잘 모르겠어서 세상에 있는 모든 휴식의 모양이 궁금했었다. 지금도 간혹 궁금해서 물어보긴 하지만 이제는 안다. 쉼의 모습은 생각보다 더욱 제각각이고 누구에게는 일로 여겨지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쉼이 된다는 것을 말이다. 무엇보다도 내가 이제는 제대로 쉬어갈 수 있는 일상을 영위하고 있기 때문에 더는 그다지 궁금하지 않다.
평론가의 일상도 저마다 물론 다르겠지만 등단한지 오 년이 아직 채 안 된 평론가의 일상에는 쉼이 쉼으로 자리하지 않는다. 때때로 쉰다는 것은 죄악시되기도 하고 혹은 최선의 경우라 해봤자 기껏 더욱 더 일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한 수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때가 많다. 삶의 리듬은 부정맥 환자의 심전도 그래프처럼 불규칙하기 이루 말할 수 없다. ‘마감’이라는 단어가 모든 일상을 좌우하고 가족이나 친구, 소중한 사람들과의 약속도 피치 못하게 유예될 때가 부지기수다. 글쓰기란 매우 중독적인 것이어서 열심히 최선을 다해 할 말을 모두 써내고 나면 계속 쓰고 싶어지기에 일의 양은 점점 늘어난다. 몸이 닳는 줄도 모르고 즐겁게 쓴다. 쓰는 행위 자체가 삶의 큰 원동력이 된다. 목표가 아니라 과정으로서 순수한 기쁨과 즐거움, 배우고 공부하는 행복이 있다. (이게 더 큰 문제다. 이래서 글쓰기를 평생 못 놓을 것 같다.) 사람들은 종종 내가 일 ‘때문에’ 건강이 나빠졌다고 쉽게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가까운 사람들은 안다. 삶에서 맞닥뜨리는 나쁜 문제들에서 깎여 나간 마음을 글쓰기에서 회복한다. 최근 이 년 정도 정말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었고 나는 그것들을 다행히도 일, 글쓰기에서 만회할 수 있었다. 내 건강을 걱정하는 이들 모두에게는 차마 다 말하지 못했지만, 겉으로 내가 소진되는 것처럼 보였다면 그건 일 때문이 아니라 ‘그 일’ 때문이었다. 정말 기만적이고 이해하기 어려운 말일 수 있지만, 내게 쓰는 시간, 그러니까 일하는 시간은 다르게 말하면 마음을 쉴 수 있는 시간이었다.
다행히 연초부터는 ‘그 일’이 나름대로 해결이 되어서 (더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의 일임을 납득하고 떠나보내었다.) 쓰는 시간 외의 시간에도 잘 쉬고 있다. 지난달에 스트레스가 아주 극심해져서 한 번 쓰러져 병원에 짧게 입원했던 후로는 더욱 더 좋아지고 있다. (이 스트레스 또한 평론 일이 아니라 ‘그 일’로부터 왔던 것임을 명확히 밝혀둔다.) 자정 무렵에 저절로 졸려서 눈을 감으면 길어야 여섯 시간 쯤 지나서 알람 없이 눈을 뜬다. 그러면 배가 고파서 절로 먹을 것을 찾게 되고 그러고 나면 힘이 좀 더 나서 뭔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하게 된다. 하루의 시작이다. 스트레스가 극심하면 자고 싶어도 잘 수 없고 깨어 있어도 일에 집중할 수 없으니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사랑하는 일(쓰는 일)을 제대로 사랑할 수 없을 때는 정말 불행했다. 돌아보니 나는 나의 글과 쓰기를 지키기 위해 부단히 고군분투 했던 것 같다. 언젠가 인스타그램에 모 책에 대한 짧은 후기를 올리면서 “사랑할 결심”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글쓰기는 내게 일이면서 동시에 휴식, 그리고 사랑이기 때문에 이것들을 내 마음껏 사랑하기 위해서 다른 영역들을 지켜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다행스럽다.
조금 가시 돋은 말을 하려고 한다. 평론가로서 지난 만 2년을 돌아보건대 문학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은 ‘문학’을 통해서 자아의 모든 욕망을 실현하려고 하면 안 된다. 그러면 문학을 계속 사랑할 수 없다. 아이러니 하면서 동시에 굉장히 냉정하고 엄혹한 말일 수 있다. 하지만 건강하게 문학을 하려면 반드시 유념해야 한다. ‘내’가 사랑하는 ‘문학’과 그 문학의 현실태인 출판시장은 완전히 별도의 것일 수 있고 특히 방점이 ‘시장’에 초점이 맞추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정신을 잘 차려야 한다. 당장에 잘 팔리는 작가의 책이 시대의 명작인 것 같고, 내 글은 그에 비하면 너무나 보잘 것 없는 것처럼 여겨지고 혹은 ‘내 친구’는 청탁이 끝없이 쏟아지는 것 같은데 ‘나’에게는 청탁이 가뭄에 콩 나듯 오는 것 같고, 그래서 내가 가진 실력은 별로고 작가로서의 능력도 바닥인 것 같이 느껴지기 딱 좋은 판이라는 뜻이다. 말해두지만 시장성이 좋은 문학을 결코 담보하지 않는다. 종종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이 글이 10년 뒤에도 읽힐 것인지 생각해보라’고 하는데 정말 좋은 문학은 빠르게 소비되고 유행을 쉽게 탈 수 있는 작품이 아니다. 지금 이 시대가 아닌 뒤의 독자들도 손을 뻗을 글을 쓰는 게 중요하다. 그러려면 창작에 긴 시간이 들 수밖에 없고, 청탁을 여러 개 연달아 받는 사람의 경우 그런 글을 쓸 가능성이 희박해 진(다고 나는 생각한)다. 뼈아픈 아이러니다. 좋은 작품을 쓰려면 이 ‘판’이 강력하게 발휘하고 있는 인정 투쟁의 장력으로부터 의연하게 벗어날 줄도 알아야 하고, ‘시장’에서 여러 이름들이 호명될 때 그에 휩쓸리지 않고 ‘나’만의 문학관과 작품론을 개진해 나가는 성숙한 잠영의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 그런데 그게 정말 정말 정말 쉽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름’과 외양에 쉽게 현혹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문학장 안에서의 ‘나’ 말고 바깥의 영역, 그러니까 ‘휴식’에서의 ‘나’도 잘 키워야 한다. 그래야 ‘쓰는 나’가 건강해진다. 휩쓸리지 않는다. 인정 욕망과 경쟁과 시기, 질투의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요즘 사람들을 만나서 들려줄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별로 없다. 좋은 일이다. 밤 되면 자고 배고프면 끼니를 챙겨먹고 해야 할 일들을 하고 날이 덜 추우면 조금 더 걷고 그러고 지내는 날들이다. 일과 휴식은 분절되지 않는다. 일하면서도 마음이 쉴 수 있고, 쉬면서도 일할 수 있다. 진부한 말이지만 결국은 마음의 문제다. 몸의 체력이 소진되었다면 병원에 가거나 약을 먹고 혹은 정말로 모든 일상을 차단하고 회복에 전념해야 하겠지만 그런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쉼은 내가 불러들일 수 있는 문제다. 일상 속의 우선순위를 매기고 그것들을 잘 처리하고, 지켜나가는 일. 사소한 약속들을 잘 지켜서 생활의 리듬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자기 자신에게도 미안할 일을 만들지 않는 일, ‘나’의 좋은 점을 ‘내’가 누구보다 가장 잘 읽어주고 느껴주는 일 말이다. 이야기 할 거리들이 별로 없어도 내가 기분이 좋아지는 계기들은 훨씬 더 많아졌다. 며칠 전에 검은 펜 한 자루와 형광펜 하나를 다 써서 분리수거 함에 버리고 핫트랙스에서 새 볼펜을 한 자루 샀는데 그게 아직까지도 기쁘다. 쓸 때마다 사소하게 즐겁다. 휴식은 객관적으로 지루한 일이지만 주관적으로는 내적인 기쁨이 내면에서 충만하게 흐르는 고요한 시간이다.
평론가는 업이 읽고 쓰는 일이다보니 예전 같았으면 쉼으로 읽었을 시와 소설을 ‘휴식’ 시간에는 더는 읽지 못한다. 대신에 눈으로 하지 않는 일들을 한다. 산책이나 클래식 음반 한 개를 통째로 듣거나 혹은 친구나 가족과 전화하기 정도. 삶이 갑자기 바닥으로 내려앉은 기분이 들거나 울적하면 할머니에게 전화를 한다. 태양처럼 영원한 빛이 사람에게도 있다면 그건 손자를 가진 할머니들의 것이 분명할 테다. 내가 살아온 시간의 몇 배를 넘게 살아오고도 의연하게 세상 속에 발붙이고 있는 분, 그 오랜 시간을 사랑해왔으면서도 계속해서 그 누구보다 큰 사랑을 주는 분. 세상 속에 그런 존재가 내 곁에 있음을 느낄 때 그 무엇도 나를 해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할머니와 밥 이야기, 무릎 이야기, 날씨 이야기, 텔레비전 이야기 이런 시시콜콜할 것들을 나누고 나면 마치 세계가 정화된 것 같은 마음이 든다. 세속의 그 어떤 나쁜 것들과 마주친다 하더라도 ‘나’라는 사람은 우리 할머니 손자니까, 그러니까 결국엔 괜찮을 거라는 절대적인 믿음이 생긴다. 이런 것들이 내게는 진정한 휴식이다. 여담이지만 우리 할머니는 내가 나온 책보다 이슬아 작가에 대해서 더 많이 말하고 궁금해 한다. (할머니, 손녀도 좀 챙기셔…) 멋진 여자는 어르신들도 금세 눈치 채고 알아보시는 듯하다.(“이슬아는 결혼했어?”/“아니?x100”)
좋은 휴식은 내일을 원하게 만든다. 그게 내 휴식의 정의다. 현재에 과거나 미래가 끼어들 틈을 허하지 않고 오로지 ‘지금’에 충실할 수 있는 집중력으로 지어진 시공간에서 머물 때 마음은 쉴 수 있다. 무엇도 회피하거나 기만하지 않는 정신으로 직시하는 일, 그러나 강제나 억압의 동반 없이 그냥 그런 상태. 자연. 내가 나인 것이 이상하지 않고 세계가 이러한 것 역시도 그리 어색하지 않은 상태. 아이러니 하지만 나는 일에 몰입할 때 쉼의 효과를 누리기도 한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 피로해지는 것은 다만 오래 앉아 있어서 쑤시는 무릎 두 개일 뿐 마음과 머리는 더없이 맑고 고요해진다. (그래서 워커홀릭의 길로 점점 접어드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그렇지만 일은 일이고 휴식은 어디까지 휴식이라는 대원칙을 좀 더 존중하자면, 그리고 좀 더 많은 이들에게 적용 가능한 구체적인 휴식의 방법들 중 하나는 가방 없이 길 위로 나서는 거다. 에코백도 안 된다. 외투에 달린 주머니쯤은 괜찮다. 핸드폰을 들고 나가지 않을 수 있다면 더더욱 좋다. 내 몸에 옷 외의 추가적인 하중을 조금도 주지 않고 풍경 속으로 녹아들기. (산책과 매한가지지만 짐이 없어야 한다는 조건이 중요하다.) 10분만 그렇게 걸어도 세계를 느끼는 감각은 아마 완전히 달라질 테다. 장담할 수 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깨끗해지고 싶다면 주머니에 두 손만 (혹시 커피가 마시고 싶어질 지도 모르니까 카드 한 장 정도 지참하고) 찔러 넣고 동네를 돌아보자.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다른 동네로 갈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관성의 질척거림 속에서 나를 건져 올려 산뜻한 이질적인 구체적 풍경 속으로 나를 데려다 놓는 것. 거기서부터 나는 애쓸 필요가 없다. 낯선 것들이 나를 절로 쉬게 해줄 테니.
평론가의 일, 그러니까 새로운 텍스트를 만나고 그 안을 서로 다른 배율의 현미경으로 크게 봤다가 조그맣게 봤다가 그렇게 번갈아가며 관찰하는 일, 낯선 것들을 발견하고 그것들이 형성하는 의미망과 이해불능의 좌표들을 기록하는 일은 온전히 타자성에 ‘나’를 내맡기는 일이다. 그러니 내가 이 ‘일’에 몰입하면 할수록 쉼의 효과를 얻을 수밖에. 사람들이 내가 일 때문에 건강이 좋아지지 않았다고들 하지만 실은 그건 사실이 아니다.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하는 다른 요소들(예컨대 나쁜 사람, 불운한 일 등)이 내 건강을 망친다. 일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휴식이 필요 조건인 것도 사실이지만 잘 일하다 보면 절로 쉬게 되기도 한다. (이게 무슨 말인지 아는 사람은 자기 일을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분명할 것이고.)
지금 이 재미없는 글을 쓰고 있는 것도 나에게는 쉼이다. 일을 잘 하거나 공부를 잘 하거나 여하튼 뭔가의 과업을 잘 하기 위해선 잘 쉴 줄 알고, 잘 놀 줄 알아야 한다. 일머리와 공부머리는 바로 노는 시간에 발달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거기서 오는 즐거움을 아는 사람은 일에서도 색다른 재미와 휴식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마무리를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다. 쓰면서 다시 한 번 내가 얼마나 고루한 인간인지 발견하는 시간이었다. 흠. 놀라우면서도 전혀 놀랍지 않다고 해야 하나. 근데 뭐, 사는 게 진짜 그런 것 같다. 단순하고 단촐하고 별 거 없다. 오늘 엄청 위기인 것처럼 느껴지는 일도 며칠 자고 보면 주변 사람들도 까먹고 나도 까먹어서 결국 없던 일처럼 되기도 한다. 그러다가 편안하게 졸리고 몸과 마음이 그 졸음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아무 생각 없이 자고 다시 일어나서 배고프면 냉장고를 열고 부은 눈으로 뭔가를 주섬주섬 주워 먹고… 그럴 수 있으면 되는 거 아닐까. 이게 정말로 소중한 항상성이라는 걸 이번 달에 깨달았다. 먹고 자고 씻고 뭔가를 시작하는 루틴은 진심으로 위대한 일이다. 아무튼, 나는 요즘 이렇게 지내고 있다. 몸과 마음에 그리 복잡한 것들을 담아두지 않는다. 그게 휴식인 것 같다. 물론, 나를 기다리고 있는 마감과 편집자 선생님은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어떤 자리에 계시겠지만 그런 것들이 휴식을 가로 막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내 삶의 일부이자 꽤 중요한 그것들을 나는 사랑한다. 나의 회복과 쉼은 ‘일’에서 온다.
모두들 이 지루하고 단순하기 짝이 없는 일상을 가득 누리시길 바라며, 삿되고 허망한 것들의 화려한 외양에 이끌려 몸과 마음을 탕진하지 마시기를. 어느 새 3월이다. 점점 길어질 낮의 시간이 나는 몹시 기대된다. 햇빛이 있는 휴식의 질은 또 다르기 때문에.
잘 쉬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