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이 지나갔다. 이번 명절에는 꼭 내려가야지 벼르고 있었는데 동생이 코로나에 확진되어 격리되는 바람에 그와 더불어 나도 서울에서 격리된 명절을 보냈다. 연휴가 끝나고 만나는 사람들이 명절은 어찌 보냈느냐 물어도 딱히 대답이 잘 나오진 않았다. 떠오르는 게 없었다. 잠을 평소보다 좀 많이 잤고, 작게 좀 아팠고… 정말 또 뭐가 있었지? 집 앞 마당에 햇빛이 들이치던 게 좋았던 것 같다. 연휴기간에도 오픈한 동네 카페에서 사장님이 설 선물로 들어온 예쁜 사과 네 알을 종이가방에 담아 싸주셨던 게 마음에 가장 크게 남는다. 따로 사진도 찍어두었다. 설날의 좋은 점은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는 말을 밑도 끝도 없이 할 수 있다는 거다.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세요,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세요. 아무리 말해도 듣는 사람도 말하는 사람도 싫지 않고 지겹지 않은 말. 얼마나 좋은가? 말로 사람을 죽이는 시대이긴 하지만 어떤 말들은 그 무너짐을 끝없이 지탱해서 막아낼 수도 있다. 하여튼, 설은 그래서 좋다.
최근 사람들을 만나면 내가 자주 묻는 질문이 있다. “요즘 삶의 낙이 뭐예요?”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좀 부담스러울 수 있는 질문이지만 그래도 물음을 감행한다. 그도 모르고 있던 즐거움을 발견해낼 수도 있고 일상을 반추해 보면서 ‘그래도 이건 좋았지’ 하고 기억할 수 있는 게 발견된다면 또 새로운 힘이 될 테니까 말이다. 지난 1월 한 달 동안은 감정도 사건도 모두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는 롤러코스터처럼 격변의 흐름 속에 있었기에 에너지 소모가 많은 날들이었다. 그 와중에도 사소하게 기뻤던 날이 있다면 어떤 북토크에 참여했던 시간이었다. 평론가로서가 아닌 그 책의 일반 독자로서 맨 뒷줄에 앉아 이야기를 들었던 시간이 참 좋았다. 역시 일반 독자의 힘이 가장 크다. 문학을 문학이게끔 추동하고 살려내는 힘은 모두다 독자들로부터 온다. 그때의 기억을 설 선물의 보자기 풀 듯 풀어보려 한다.
연남동의 한 서점에서 1월 중순의 어느 날 나는 오랜만에 독자의 한 사람으로 진심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때의 즐거움이라함은 예상치 못했던 이야기가 마음 한가운데로 날아와 딱딱한 세포벽들을 녹이고 해체된 영역의 세포핵들이 제멋대로 흘러 다니게 되는 우연의 경험, 그래서 결국은 눈물을 훔쳐내며 솟아나는 과거의 기억들과 조우하게 되는 경험, 텍스트와 작가의 말과 나의 삶이 손잡으며 내가 살고 싶은 미래를 절로 그려보게 되는 경험에서 나오는 기쁨이라 할 수 있겠다. 평론가로서 참여하는 책 행사나 독서에도 물론 기쁨이 있지만 일로서의 층위를 내려놓고 좀 더 자유로운, 그러니까 아메바와 같은 원시적인 상태에서 마주하게 되는 책과의 만남은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자유로운 기쁨을 선사한다. 비평은 작품, 작가와 모종의 거리두기를 전제하는 행위이므로─물론 비평가마다 다른 거리감을 갖겠지만─엉엉 우는 일은 좀체 일어나지 않는다. 객관이 담보하는 주관의 세계에 의식을 설치해두고 작품과 만나는 일이 비평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평가가 아니라 보통의 독자로서 작품 앞에 서게 되면 그것이 나를 압도하여 무너뜨리거나 지나간 생의 멱살을 잡고 뒤흔드는 경험까지도 허하게 된다. (무너지는 일도 허락이 필요한 의식이라니, 비평가의 의식이란 얼마나 냉정한 것인가 싶지만 그런 것까지도 문학이라는 생태의 한 부분이니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 즐거웠던 시간 동안 나는 엄마를 떠올렸다. 문학은 결국 타인들의 세계가 아닌가. 하루, 일주일, 한 달, 그리고 일 년의 시간 중의 대부분을 나는 타자들의 세계에서 헤맨다. 그런 내가 엄마라는 타자에 대해서는 그토록 궁금해 하지 않았다니, 새삼 요상한 이질감을 느끼며 동시에 엄마야말로 나에게 가장 낯선 이방의 존재가 아닌가 생각했다. 나의 어린 시절 안에는 엄마가 있지만 나는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자기 삶 속에서 어린 나를 위치시켰을지 알 수 없다. 고등학교 선생님이었던 그녀는 일정한 주기로 타지역 전근을 다녀야 했고 그래서 길게는 한 달에 한 번, 짧게는 1-2주에 한 번 주말에 나를 만날 수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전까지 엄마는 우리집 근처의 학교에서 근무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몇 년 뒤에, 육아의 고단함이 얼추 잦아들 수도 있을 만한 시기에 엄마는 나의 친할머니의 압박으로 교직을 그만두어야 했다.) 수술실로 들어가기 전 금식으로 주린 배를 안고 물이 마시고 싶다고 하자 물수건으로 입술을 적셔주던 손의 마음을, 한밤중 모두 불이 꺼진 병실에 정장 차림으로 핸드백과 신상 레고 박스를 들고 내 옆에 앉던 그 마음을 나는 알지 못한다. 동생과 블럭을 갖고 놀다가 내가 애써 완성한 요새를 동생이 멋대로 무너뜨렸을 때 짜증 부리던 나를 보던 그녀의 마음을 나는 알지 못한다. 그때의 그녀를 나는 알고 싶었다.
자식을 낳는다는 것, 그리고 그를 기른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일일까? 누군가는 역경이라고 하고, 누군가는 나의 중심을 버리고 오로지 자식이라는 타인에게로 옮겨두는 일, 자기를 잃어버리는 일이라고도 한다. 또는 무한한 사랑을 주고 그와는 또 다른 무한한 사랑을 받는 일이라고도 한다.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이 혼합된 복합물이 부모 자식의 관계인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자식의 입장에서 아마 평생 해결하지 못할 것 같은 불가해한 질문이 하나 있다. 엄마는 도대체 뭘 믿고 나를 그렇게 사랑한 걸까. 도대체 뭘 믿고 내게 이렇게 멋지고 좋은 삶을 보여주려 한 걸까. 도대체 뭘 믿고 자기 삶의 일부를 도려내어 나에게 준 걸까. 내가 어떤 사람일 줄 알고……
최근에 나도 ‘내 자식’이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희미하게 든 적이 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닮은 그리고 나의 어떤 면을 닮은, 나와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분리된 존재, 그러나 내가 세상에서 가장 무한하게 사랑할 수 있을 존재를 만나고 싶다는 욕망을 가진 적이 있다. 안타깝게도 지금의 사회·문화적 현실은 내가 ‘내 자식’을 가지지 못할 확률이 높은 상황이다. (인간은 희한하게 이기적인 존재이니 어떻게든 하고자 한다면 낳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꼭 혈연으로 얽힌 부모자식 관계가 아니더라도 그와 유사한 관계성은 다른 인간관계 안에서도 종종 발견되고 경험된다. 가령, 진심 어린 열정으로 가득한 두 연인 사이에서는 희생, 그리고 자식을 인내하는 부모의 질긴 마음 등이 발휘되기도 한다. 또는 어떤 사제 관계에서는 동년배의 진한 우정 못지않게 부모 자식의 관계성이 발생하기도 한다. 선생이 학생을 길러내는 모습은 흡사 부모가 자식을 키워내는 것과도 비슷하고, 역으로 자식이 종종 부모를 성숙한 인간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처럼 제자가 스승의 앎과 삶을 깊어지게 하기도 한다. 완벽한 두 타자의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격과 생이 부딪치고 교차하면서 파생시키는 사랑이라는 물결 속에서 이 모든 것들은 살아 숨 쉰다.
산다는 게 뭘까 하는 질문은 마음이 복잡하게 뒤숭숭할 때 떠오르지만 의외로 그 답은 항상 별거 없다는 가장 단순한 좌표 위에서 나타난다. 새해를 맞아 반추하는 지난 일 년 속에서 우리에게 남는 것은 대개 단순한 기쁨들인 것 같다. 하루 스물네시간을 아주 복잡하게 고군분투하며 스트레스 받고 머리 싸매며 괴로워하다가도 일 년만 지나면 절로 증류되어 순도 높은 알갱이들이 하얀 눈이 되어 머리 위로 떨어지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시간의 힘은 그렇게나 위대하다. 더불어 내가 사람들에게 던졌던 이어지는 질문은 이것이었다. “새해소망은 무엇인가요?” 삶의 낙이 무엇 무엇이라면 그 위에 새로 얹고 싶은 좋은 것은 무엇인지 궁금해서였던 것 같다. 내가 빌었던 새해 소망은 딱 한 가지였다. 지금 내가 좋다고 느끼는 것들에 대해서 이 좋음의 감각을 놓치지 않게 해달라는 거였다. 좋은 것들을 여전히 좋게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이 유지되었으면,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 감각의 힘이 더 튼튼해졌으면 하는 바람 말이다. 어떤 사건들이 일어나거나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확률보다 내 마음에 대해서 무언가를 바라는 것의 확률이 훨씬 더 높은 성공률을 갖지 않을까? 무엇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 마음’이니까, 내 것이니까. 내가 확실하게 절대적인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우주 유일의 객체물이니까.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종종 자신의 소유물로 오인한다. 네가 날 사랑하고 내가 널 사랑한다면 ‘우리’ 둘 사이에는 배타적 소유관계가 성립한다고 그러니 ‘너’는 내가 바라는 대로 행동해주지 않으면 그것은 잘못이라고, 책임의 소재가 생기는 거라고, 추궁할 ‘권리’를 갖게 된다고 말이다. 나에게 불가해한 사랑을 준 엄마와 아빠는 그런 것은 없는 거라고 살아오는 내내 몸으로 내게 보여준 사람들이다. 집을 떠나오기 전까지 나는 그런 소유관계를 주장하는 사랑을 나는 보지도, 배우지도, 그래서 알지도 못했다. 사랑 속에서 나타나는 ‘책임’은 ‘내’가 바라는 대로 ‘네’가 행해줄 것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의 목소리를 최대한 온전히 들어주는 것, 그러니까 ‘내’가 ‘너’의 청자로서 언제나 상호 연관된 반응으로서의 대화를 다할 것에서 온다. 책임은 상대를 벌하기 위한 요건으로서가 아니라 내가 너라는 절대적으로 불가해한 타자를 더욱 온전히 듣고 알아가기 위해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덕목인 것이다. 해러웨이가 말한 존재론적 안무인 실뜨기 놀이처럼 나의 주체성이 타자인 ‘너’의 말과 행동에 대한 반응으로서 구성되는 세계, 그것이 바로 내가 아는 사랑의 세계다. ‘너’의 고유한 개인성은 나의 고유성을 파열시키고 때로 붕괴시키기도 하겠지만 기꺼이 파괴되고 또 새로이 생성될 그 미래를 마다하지 않는 열림의 가능성으로 충만한 것이 나는 사랑하는 이들의 주체성이라고 생각한다. 두 사람 사이의 이 실뜨기가 가능하려면 신뢰가 전제되어야 한다. 이때의 신뢰는 ‘나는 네가 내가 원하는 대로 할 거라고 믿어’라는 식의 일방적인 강요를 동반한 집착이 아니라 내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면 그 표현이 상대에 의해 정직함으로 수용되리라고 기대하는 단단한 낙관을 말한다. 그러니까, 실뜨기에는 기만이 없다. 나는 네가 손가락을 움직여 만든 모형을 보고 그 모형의 다음 모형으로서 내 손가락을 움직인다. 그렇게 우리는 ‘내’가 ‘너’가 되지 않으면서도 단단히 결속된다. 아니, 오히려 ‘내’가 ‘네’가 될 수 없음으로 인해 오히려 더욱 강력하게 연결된다. 이것이 내가 평생 살아오면서 배운 사랑의 모형이다.
코로나 격리로 우리 가족은 물리적인 공간을 함께 점유하며 공통의 시간을 보내지는 못했지만 각자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상대방의 안부를 묻고 근황을 나누며 여느 때와 같은 어떤 날들을 보냈다. 상호 신뢰의 전제 위에서 ‘나’와 ‘너’의 자유가 횡단하는 빈 공간은 방임의 결과물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이 숨 쉴 수 있는 여백이자 바탕이 되는 흰 도화지다. 지난 한 달 동안 나는 모종의 사건들로 신체적으로도 심적으로도 많이 괴로웠다. 사람들이 보기엔 단지 일이 많아서 스트레스가 과해서 그런가보다 했을 테지만 사람을 이 정도의 고통으로 몰아가는 것은 일이 아니라 사람이다. 직장에서의 스트레스도 결국엔 사람 사이의 관계 때문에 온다. 일은 그 사이에 놓인 중간지대인 경우가 많다. 일이 비상식적으로 불합리하게 나에게 부과되는 경우가 아닌 한, 일의 강도와 양이 아무리 과다하다 해도 함께 하는 사람들이 좋은 사람이라면 현명하게 과업을 수행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비합리적인 일의 형태도 결국에는 수정될 것이다. 그러니, 사람이 주는 고통 역시도 사람이 낫게 할 수 있다는 점은 새삼스럽게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이다.
새해에도 내가 지금 가진 이 쉽지 않은 낙관을 굳게 믿을 수 있으면 좋겠다. 그게 나의 소망이다. 언젠가는 나도 엄마 아빠가 내게 준 불가해한 사랑을 나의 아이에게 줄 수 있을까? 친구들은 이미 유치원 학부모이거나 돌잔치를 여러 번 했고 인스타그램에 육아 기록들을 남기느라 정신없다. 나는 랜선 이모가 되어 아이들 사진을 보며 흐뭇해하거나 오구오구 하면서 예뻐할 뿐이다. 인간이 세상에 자식을 남기는 이유는 사랑의 모형을, 실뜨기 놀이하는 법을 가르쳐주고 각자의 세계가 얼마나 아름다운 것들로 충만한지, 그 좋음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충분히 감각했으면 좋겠다는 욕망에 의해서인 것 같다. 내가 좋다고 느끼는 것을 내가 사랑하는 사람도 함께 느꼈으면 하는 마음을 우리 모두도 알지 않나. 산 아래서 불어오는 차고 맑은 겨울 바람의 상쾌함을, 밤의 노란 가로등 아래에서 납작하게 내리는 눈송이들의 빛을, 책을 보다 잠든 사람의 이불을 덮어주고 이마에 뽀뽀해주는 그 온기를, 책을 읽으며 흥분하여 책장을 쉼없이 넘기는 그 재미를 알려주고 싶은 마음 말이다. 인류가 여기까지라도 존속해 올 수 있던 힘은 누가 뭐라 해도 나는 사랑인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랑인 것 같다. 설에 모인 가족들을 보며 부모 그리고 조부모들은 그런 것을 느끼지 않을까? 내가 길러낸 ‘인간’들이 다채롭게 각자의 실뜨기를 해 나가는 모습을 대견해하는 마음, 그리고 자식 낳기를 참 잘했다고 생각하는 마음. 아무리 서로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고 눈물 흘리게 해도 그래도, 세상의 좋음을 알려준 최초의 기원이 '나'라는 뿌듯한 마음은 정말로 부모가 되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영역의 것일테다. 영원히 불가해한 미지수의 영역.
아, 글을 쓰고 나니 새해 소망을 하나 더 추가해야 할 것 같다.
국회는 차별금지법을 통과시켜라! 나도 육아스타그램 좀 해보자고요. 하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리고 많이 사랑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