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2. 4
워드프로세서의 빈 화면을 켜놓고 문장을 이렇게 오래도록 시작하지 못했던 건 참으로 오랜만이다. 이별이라니. 무수히 많고 겪을 때마다 마치 생애 최초의 사건처럼 치명적인 이 단어의 시작을 어디서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일까. 이별이라는 말 앞에서 며칠을 머무르다가 겨우 쓴다. 쓴 것을 모조리 지우고 나서 김치사발면에 날계란 하나를 올려 책상으로 가져와서 쓰는 새벽 세 시다. 우선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적어보기로 한다. 할아버지, 병원, 학교, 옷, 사법시험, 그리움, 기억, 펩시콜라, 예고장, 감옥… (이 각각에 대해선 또 언젠가 얼마간 풀어놓을 기회가 생기기를 바란다.) 나를 떠나간 것과 떠나보낸 것에 관한 이름들이다. 인생의 한 시절을 속절없이 떠나보내는 불가항력의 이별도 있고 혹은 기를 쓰고 해내야만 하는데도 끝끝내 하지 못하는 이별도 있다. 계속해서 불시착하는 운석들처럼 머리와 마음이 충돌하고 갈등할 때 우리는 시간의 무한루프 안으로 갇힌다. 오늘은 후자에 대해서 말해보려 한다.
일전의 메일에서 후배에게 걸려온 전화 한 통을 언급한 적 있다. (“언니, 드디어 헤어졌어요.”) ‘나’에게 유독한 줄을 알면서도 끊어내지 못하는 관계, 혈연으로 종속된 관계가 아님에도 그리고 그것이 나의 정신과 일상의 평화를 실시간으로 조각내는 것을 알면서도 떠나지 못하는 관계는 도대체 왜 이어지는가? 지금 이 글을 이렇게 쓸 수 있는 것은 내가 그 이별의 프롤로그도, 본문도 아닌 에필로그까지의 집필을 마쳤기 때문이다. 비로소, “이제는 쓸 수 있다.”는 떠나옴의 국면이다. 한편으로 이 글은 온전히 나의 주관적 경험에 기반하고 있으며 이 지면에서 상정되는 모종의 관계성은 하나의 것이 아니라 내가 그동안 겪어온 복수(plural)의 이별에 대한 집합체로 빚어졌음을 일러둔다. 더불어 내가 확실한 객관의 층위까지 밝힐 수 있는 것은 ‘너’라는 2인칭이 아닌 1인칭에 국한된다는 점도 미리 밝힌다.
모든 이별은 어쩌면 시작도 진행도 아닌 끝난 후에야 비로소 사건과 관계의 전말이 서서히 또렷해지는 후일담인 것도 같다. 누군가 혹은 삶의 어떤 국면을 떠나보내고 나서 우리는 여러 가지를 돌아본다. 그것은 ‘우리’에 대한 성찰이지만 종국에는 언제나 ‘나’에 관한 성찰로 귀결된다. 나는 그 관계에서 어떤 모습이었나? 그 관계에서 내가 바라던 욕망은 무엇인가? 그가 내게 바랐던 것 그러나 내가 주지 못한 것은 무엇인가? 왜 나는 그것을 줄 수 없었나? 왜 그는 나에게 그런 것들을 바랐나? (‘그’의 자리에는 다양한 사람과 사물과 사건이 들어갈 수 있겠다.) 내가 힘들었던 것의 실체는 무엇이었나? 이 모든 물음표의 난삽함이 정리되기 위해서는 우선 내가 그 이별의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나의 무엇이 무엇 때문에 힘들었는지를 먼저 정리해야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여러 차례의 상담과 정신과 진료를 통해 나는 세상의 많은 일에 관한 당위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인 것으로 밝혀졌고 관계가 그러한 당위에 들어맞지 않게 흘러갈 경우 온몸을 불사르며 혼란스러워하고 아파하는 이(였)다. 가령, 누군가가 나의 관심을 받기 위해 일부러 나를 소홀함과 무례로 대하면서 다소 폭력적인 표현들을 던질 때 나는 그러한 상황이 ‘나’의 관계에서 발생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몹시 힘겨워하며 내가 그에게 전했어야 할 나의 슬픔과 화를 안으로 끌어당기며 웅크렸다. 밖으로, 관계의 표면으로 표출했어야 할 마땅한 나의 감정들 안에서 두려워하기만 한 것이 나의 난점이었다. 물론, 용기 내어 말을 한 적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행동하지 말아달라, 그건 당신이 바라는 바를 얻을 수도 없으며 단지 내게 상처만 남길 뿐이다─라고 말하더라도, 돌아온 것은 (내 입장에서는) 더욱 심한 공격뿐이었다. 그에게는 그것이 자신의 욕망을 주장하는 언어였다는 걸 겨우 인지하게 된 것은 일이 있고 나서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다.
두 사람의 생이 얽혀서 만들어내는 관계는 하나의 욕망이 아니라 둘 이상의 욕망이 경합하는 장소다. 누군가와 내가 잘 맞는다면 그건 욕망이 하나로 일치해서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욕망을 인정하고 수용해주고, 혹은 수용할 수 없다 하더라도 그 없음에 대한 납득을 정직하게 해나갈 수 있는 토대가 있기 때문이다. 나와 같은 타자는 없다. 다만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노력과 성찰의 최대치는, 리쾨르의 말을 빌리자면,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가능할 따름이다. 타자성을 자기성의 분리된 대립물이 아니라 자기성의 한 부분으로서의 타자성을 놓아둘 경우 세계는 완전히 다르게 보인다. ‘나’의 절대적인 외부성으로 여겨지는 타자의 존재 조건을 ‘나’의 안으로 들여올 경우 관계성은 사유의 출발에서부터 이미 확보된다. ‘그’와 나는 이러한 자기성과 타자성의 관계의 문제에서 정확히 반대의 벡터로 내달리고 있었다. 그는 타자인 내가 자신과 거의 같아지길 바랐고, 나는 나의 타자성을 그로부터 어떻게든 확보하려 애썼다. 동시에 나는 그의 타자성을 내 안에서 도대체 어떻게 헤아려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기도 했다. 그저, 그가 나를 조각하며 깨부수는 내 세계의 외피가 떨어져 나가는 걸 보면서 슬퍼하는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라고만 판단했다.
한편으로 그는 내가 그를 연민하기를 바랐고 나는 그에게 공감하길 원했으며, 공감 받기를 원했다. 우리는 종종 의문한다, 연민과 공감의 차이는 무엇인가? 전자는 파토스의 영역의, 후자는 에토스의 영역의 언어인가? 혹은 힘의 영역에서 전자가 후자보다 훨씬 더 직접적이고 강렬도가 높은 것인가? 리쾨르에 의하면 연민과 공감은 자기와 타자의 역학 관계에서 차이를 보인다. 연민의 행위에서 ‘나’는 타자가 처한 모든 처지로부터 면제되어 있으므로 자기성이 타자성을 압도한다. ‘너’에게 완벽하게 연루되지 않(못)다는 점에서 공감과 연민의 첫번째 분기점이 생겨난다. 반대로 공감의 세계에서 자기성은 타자성에게 굴복한다. 공감은 주체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행위성을 요청하므로 공감의 초기에는 자기성이 타자성보다 우월한 듯 보이지만, 그 세계 안에서 ‘나’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나’를 구성하는 것은 결국 타자성이므로 끝내 관계는 전복된다. 공감의 세계에서 ‘나’는 ‘너’를 이기지 못한다. 그것은 자발적 패배다. ‘그’와 나는 이런 식으로 극단에 서 있었다. 그러나 서로의 어떤 부분들을 사랑했고, 욕망했고, 가까이 맞닿아 있기를 바랐으므로 서로를 깎아내는 이러한 마찰들을 기꺼이 감내했다. 그러나 우리는 도저히 교차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 ‘나’는 ‘너’를 떠났고 ‘너’는 그런 ‘나’를 역시, 받아들이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너’를 연민하기 싫었다. 연민의 대상이 되기도 싫었다.
해롭고 유독하지만 끊지 못하는 관계―의 아주 대표적인 사례로 지난 메일에 썼던 담배가 있지 않을까 싶다. 이 경우는 나 자신이 나를 해치면서도 관계로부터 얻어내는 모종의 쾌락이 간섭하는 경우다. 순간적으로 획득되는 욕망과 즐거움이 결과적으로는 나를 해하는 걸 알면서도 그 관계와 나를 계속해서 결탁시키는 일이다. 앞에서 말한 2인칭이나 3인칭의 자리(‘너’와 ‘그’)에 들어가는 것이 담배거나 술이라면 그래도 차라리 낫다. 그것들은 우리의 인격적인 변형을 크게 가하진 않는다. (물론 과도한 음주로 이성을 상실한 경우는 당연히 예외다.) 그러나 그 자리에 들어가는 것이 가족이나 연인, 지도교수와 같이 삶의 성장과 향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이름이라면 당신은 반드시 이별을 준비해야만 한다.
그런데, 민감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할 점은 여기까지가 아니라 바로, 여기부터다. (우리는 직감적으로 떠나야만 할 것 같은 대상들을 꽤 잘 감지한다.) 당신이 이별을 고하는 상대가 담배도 술도 아닌 어떤 사람이라면 당신은 아마도 그를 가해자로, 그리고 당신을 피해자로 위치 지으려 할 것이다. 그건 본능적인 유혹이기도 하며, 실제로 얼마간 사실이기도 하며, 타당하다. 그러나, 공감의 세계에서 자기성이 타자성을 초반에 압도하다가 종국엔 타자성에게 자신을 내어주었던 것처럼, 당신은 이별 후 그러한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도에서 빠져나오도록 노력해야 한다. 여기에는 타협의 여지가 없다. 반드시 빠져나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피해자’라는 안락한 소파에서 결코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 소파는 당신의 무릎을 아프게 할 것이고 배가 고파도 부엌으로 가서 요리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가 물리적으로 당신의 세계에서 추방된다 할지라도 당신의 집착과 강박에 의해 그는 당신의 인식을 영원히 좌지우지하며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 이미 옆에 실재하지 않는 ‘그’에게 서서히 잠식되는 줄도 모른 채 당신은 소파의 아늑함에 묻혀 시간을 탕진하고 말 것이다. 이는 모든 이별에 해당되는 주의사항이다.
그렇다. 방금 나는 최근 몇 년간 아주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할 단어 ‘피해자’를 썼다. 이때 가해와 피해의 구도는 법적인 문제 또는 문서나 서류로 다루어질 법한 사실의 차원에 있지 않다. 철저히 관계 내 당사자들의 감성과 인식의 세계에서만 실재하는 (허구가 아닌) 현실이다. 어쨌든 생각해보라, 그렇게 치열하게 사랑하고 싸우고 슬퍼하고 아파한 후에, 피해자들만 남는 관계란 얼마나 허망한가. 물론, 이별 직후에는 각자의 억울함이 있고 주변인들에게 토로하는 일은 분명 필요하다. (고마운 사람들의 덕을 입어야 할 때인 것, 우리는 모두 타자들의 관계성 위에서 지탱되며 살아간다.) 공감에 기초한 이해의 과정은 주체가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을 안정화한다. 고립감과 소외로부터 ‘나’를 지켜주는 건 ‘나’의 자기합리화가 아니라 ‘너’의 인정과 수용이다. 얼마간의 감정적 지지가 이루어진 후에 이별한 자는 소파를 박차고 일어나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길과 꽃과 새들을 만나고 교감할 수 있으니까.
이 글을 읽는 당신이 현재 어떤 이별의 어떠한 국면을 지나고 있는지 모르지만 많은 이들이 모종의 두려움으로 이별을 무작정 혹은 끈끈하게 견뎌내고 있을 것 같다. 관계에 속했다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상대를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의 발로로 이루어진 것일 테니 말이다. 관계의 종료는 그 모든 것을 떠나보내야 함을 뜻하기도 한다. 더 이상의 안부와 식사를 걱정할 수 없고 힘들 때 내가 힘이 되어주겠노라 선뜻 말하기 어려워지고, 그리고 그와 나 사이에 형성된 친구들 모두를 잃어버려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정여울은 『마흔에 관하여』(한겨레출판, 2018)에서 정확히 이러한 관계를 이별한 경험을 허심탄회하게 풀어놓는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착취하던 애인을 떠나보내며 가장 두려웠던 것 중 하나가 친구들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거였다고 한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관계를 ‘끝내자’고 한 것은 내 쪽인데, 그 후로 오랫동안 더 깊은 상실감을 느낀 것 역시 내 쪽이었다는 것이다. 돌이켜보니 그것은 그 사람을 비롯한 다른 타인들, 그러니까 그와 함께할 수 있었기에 만날 수 있었던 다른 사람들과도 모질게 인연을 끊어야만 그의 거대한 존재의 그늘을 벗어날 수 있다는 강력한 예감 때문이었던 것 같다.” 「거절해야 나 자신이 된다」) 그러나 그는 사랑하는 타자들을 잃어버릴 지도 모른다는 위험과 자기 자신의 독립성과 자유로움을 통째로 잃어버리는 일 중에 마땅히 후자를 의지적으로 선택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그때 사랑했던 사람과 그 주변의 많은 선후배들을 잃었지만, 누군가의 친밀함과 다정한 보살핌 없이도 꿋꿋하게 살아남는 법을 배웠다.”) 힘겨운 이별을 끝낸 이들에게 정여울의 이 책을 추천한다. 그는 자신의 상처를 솔직하게 내어 보이지만 그것은 자기과시도, 미화도, 합리화도 아닌 아니, 오히려 그 모든 손쉬운 책략들을 단호하게 배격하는 방식으로, 자기 자신과 정직하게 거리를 두며 이야기를 들려준다. 연민과 사랑, 괴로움이 뒤섞인 혼란의 시절을 통과하고 나서 우리 안에 소슬히 떠돌고 부유하는 물질들이 무엇인지에 대해 그의 글을 읽으며 알아가게 된다.
자기(self)에는 두 가지 층위가 있다. ‘나’가 바라보며 스스로 형성해 나가는 자기동일성과 타자와의 관계성에서 정초된 자기성이 있다. 연민은 전자에게 다가갈 수 있고 공감은 후자에게 손을 내밀 수 있다. 단언컨대, 후자의 영역에서의 ‘나’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이와 이별을 고민하고 있다면 가감없이 그 선택지를 집어들라고 말하고 싶다. 자기동일성의 세계에 ‘나’를 구속해두려는 이는 ‘나’의 고유한 활력과 세계를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타자, 관계, 사랑, 돌봄, 슬픔, 괴로움―이 모든 다채로움은 삶을 더욱 껴안기 위해 우리가 겪어내는 세상의 미스터리들이 아닌가. 새로운 ‘나’를 발견할 수 있게 하는 타자성, ‘나’의 오롯한 무늬와 세계를 부수는 자와는 과감히 이별하라, 그리고 자기동일성으로의 폐제를 기꺼이 파괴하는 타자들 속으로 흘러 들어가라. 다가올 새로운 사람들과 인연에 손을 내밀어라.
이젠 소파에서 일어날 시간이다. 맛있는 저녁을 먹으러 가자.